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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Sep 01. 2023

낯선 사람이 초인종을 누르면

문을 안 열어줘도 좀 그렇고, 열어주자니 그것도 좀

이틀 전이었던가. 집에 혼자 있는 낮시간에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온라인 마트에서 장을 보면 기사님이 문 앞에 물건을 두고 벨을 누르고 가시는 경우가 있지만, 그날은 주문한 게 없어서 뭘까 궁금했다. 누굴 초대한 적 없으니 우리 집에 올만한 사람도 없었다. 패드 화면을 살펴보니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서있었다. 한 번 누른 초인종 소리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 울리고 있었는데, 어쩐지 나는 집에 있는 인기척을 내기가 망설여졌다. 내가 문 열림 버튼과 닫기 버튼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동안 현관문 밖의 남자는 문 앞에 세워둔 자전거를 살펴보고 있었다. 남자가 등을 돌리고 선 덕에 그가 입은 빨간 조끼 위에 소방 안전이라고 인쇄된 글자를 보았다.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히 그의 신원은 확인된 셈이었는데 나는 결국 문 열림 버튼도, 닫기 버튼도 누르지 않았고 그 남자는 집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대로 월패드 화면에서 사라졌다.


20초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그사이에 난 별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누구지? 웬 남자가 우리 집 벨을 왜 눌렀지?

    자전거는 왜 살펴보는 거야. 파란색이니까 이거 보고 우리 집에 남자아이가 산다고 추측할 수 있겠는데.

    그래도 소방 안전이라고 적힌 조끼를 입은 걸 보면 진짜 소방 점검하러 나온 걸 수도 있잖아.

    아냐, 요즘 세상에 집에 혼자 있을 때 낯선 사람 문 열어주면 안 되지 암.


그다음 날엔 동네 사람들과 정보를 주고받는 카카오톡 방에서 한바탕 해프닝이 있었다. 우리 아파트 단지 맞은편에 있는 대형 마트 앞에서 웬 남자가 식칼을 들고 돌아다니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내용의 메시지가 돌아다녔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세상이 흉흉하다, 마트도 마음 편하게 못 다니겠다며 한탄을 했다.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남편은 종일 내가 집에 있는 날이라는 걸 알면서도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메시지를 보내왔다. 

몇 시간 뒤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마트 옆에 있는 감자탕 집에 깍두기 담글 무가 트럭으로 들어오는 날이라 그 식당 주방장이 손에 무 다듬을 칼을 든 채 가게 앞에 나와있었던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집에서 혼자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주방 밖으로 칼을 들고 나온 건 분명한 실수지만, 오죽 급한 마음 아니면 반가운 마음이었으면 그랬을까 싶었다. 또 트럭에서 내린 무 손질하던 와중에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을 생각을 하니 세상 참 별일 다 있네 생각이 들었다. 



하루이틀 사이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던 붉은 조끼 차림의 남자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엘리베이터에 붙어 있던 공지사항을 읽고 아차 싶었다. 아파트 전 세대를 대상으로 며칠에 걸쳐 소방 점검을 실시할 예정이고 지하주차장, 엘리베이터와 같은 공용 구역에도 해당하니 복도에 자전거, 유모차 따위를 세워둔 세대라면 반드시 치워달라는 내용이었다. 하필 우리 집 현관문 바로 앞에 소화전이 있고 그 앞에 아이 자전거를 세워뒀는데. 그걸 치우지도 않고 안내차 방문한 사람에게는 집에 아무도 없는 시늉을 했으니 창피한 노릇이었다. 공고문 게시 일자를 보니 일주일쯤 된 것이었다. 여태 그걸 한 번 안 살펴보았다니. 무슨 정신인가 싶어 스스로가 한심했다.


정말 기쁘게도 그 남자가 오늘 점심시간 무렵에 우리 집 초인종을 또 눌렀다.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얼른 문 열림 버튼을 누르고 현관으로 마중을 나갔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그는 등에 소방 안전이라고 인쇄된 조끼를 입고 있었다. 며칠 전보다 날이 좀 서늘해졌는데도 짧게 자른 머리칼 끝에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월패드 화면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앳된 얼굴이었다. 허여멀건한 피부색에 왠지 조금 살집이 있고 어리숙해 보이는 움직임이 20대 초중반 아르바이트생 같았다. 

그는 현관, 주방의 소화기를 살펴보고 내게 확인서에 서명을 해달라고 했다. 담당자가 직접 세대에 방문해 점검을 완료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서둘러 내 이름을 흘려 썼다. 그 사이에 성실한 이 담당자는 소화전 앞에 세워둔 자전거를 옮겨두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나는 얼른 네네, 하고는 '커피 드세요? 아메리카노가 좋으세요, 라떼가 좋으세요?' 하고 물었다. 그가 말끝을 흐리며 답을 못 하길래 '두 개 다 가져가세요. 주머니에 넣어 가시면 어때요?' 하고는 냉장고에서 캔커피 두 개를 꺼내 내밀었다. 그는 고맙다고, 잘 마시겠다고 세 번쯤 말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나는 그 뒤통수에 대고 '두 번 걸음 하시게 해서 죄송해요. 제가 그땐 부재중이었어요.'라고 말했다.


또 낯선 사람이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른다면 난 문을 열어줄 수 있을까?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월패드 속 얼굴과 움직임을 뚫어져라 살펴보며 문을 열어 말아, 짧은 시간 안에 번잡스럽게 머리를 굴릴 것이고 그 사이 방문객은 문 앞을 떠날 것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남을 경계하는 마음이 기본값이 된 걸까. 괜한 의심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요즘 세상이 그런 걸 어떡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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