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기세라면 둘 중 하나가 되기엔 충분하다
1.
할머니는 어릴 적부터 날 볼 때마다 이런 말씀을 하셨다.
"검은 머리카락이 빽빽하게 난 게 복이야. 얼마나 예쁜지 몰라."
"나는 우리 손녀 머리숱 많은 게 제일 자랑이야."라는 말을 만날 때마다 하셨다.
아주 어릴 땐 '빽빽하다'는 말소리가 우스워서 깔깔 웃었다. 사춘기 무렵엔 '오죽 칭찬거리가 없으면 머리숱 많은 게 자랑일까' 하는 생각에 뾰로통한 날이 더 많았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내 머리칼은 눈에 띄게 짙은 검은색이었다. 검은 머리 색이 다 똑같지 더 짙은 건 뭐야,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그냥 검은 머리카락이 수채화 물감이라면 내 머리카락은 포스터칼라 같은. 그런 검은색이었다. 게다가 숱도 무척 많아서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고무줄로 묶어두면 얼마간 팽팽히 견디다 끊어지기 일쑤였다.
다음 달에 꽉 채운 90세가 되는 할머니는 꽤 오래전부터 외출할 때 꼭 모자를 쓰신다. 가끔은 집으로 찾아뵈어도 실내복 차림에 모자를 쓰고 계신다. 할머니는 요즘도 내 머리숱 이야기를 하신다.
"우리 손녀가 날 때부터 머리숱이 많았는데 직장 생활하더니 저렇게 머리숱이 줄더라니까."
"나는 우리 손녀가 집에 다녀가면 바닥에 죄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어서 얼마나 속이 상하는지 몰라."
흰머리가 있는 건 알아차리시지 못한 눈치지만, 어린 시절에 비하면 절반도 남지 않은 머리숱이 할머니 눈에도 잘 띄나 보다. 나는 할머니의 탄식에 매번 '그러게 말이에요 허허'하고 만다.
2.
종종 들르는 집 근처 마트가 있는데, 어느 날은 다섯 살 아들과 함께 갔다. 카트에 타고 있던 아이가 별안간 "저 사람은 스님이야?" 하길래 고개를 돌렸더니 마트 유니폼을 입고 물건을 진열하는 민머리 사내가 있었다. 일순간 정적을 나만 느낀 줄 알았는데, 근처에 있던 서너 사람 모두 민머리 사내의 눈치라도 보는 듯 고개를 슬쩍 든 채였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야, 아니야." 하곤 얼른 카트를 밀었다. 하지만 내 아들은 그 새를 참지 못하고 "왜? 아빠가 머리카락 없는 사람은 스님이랬는데."라고 말했다. 카트를 밀며 재빨리 걷는 와중에도 고개가 절로 수그려졌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와 짧은 이야기를 나눴다.
"머리카락이 없다고 해서 다 스님이 아냐. 할아버지도 대머리지만 스님은 아니잖아."
"하지만 할아버지는 대머리가 아니니까 스님이 아니야. 할아버지는 머리카락이 조금 있잖아."
이 일화를 남동생에게 이야기했더니 그래도 누나는 여자니까 대머리 유전자 물려받을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다. 난 동생에게 대머리 유전자는 한 대를 걸러 유전된다고 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하지만 동생은 할아버지도 아빠도 대머리니까 한 대를 거른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다고 했다.
"그럼 성별에도 상관없이 유전되는 거 아냐?
동생이 '에이, 말도 안 돼!'라고 말했다면 좋았을 테지만 걔는 그러지 않았다.
동생은 "그런가?"라고 대답했고 검은콩과 맥주효모, 탈모 샴푸에 대해 연이어 이야기했다.
3.
흰머리 서너 개가 눈에 띌 땐 나름대로 솎아내는 재미가 있었다. 미용실 원장님은 절대 뽑지 말라고 했지만 눈에 보이는 몇 가닥만 뽑아 없애면 그 흔적을 감쪽같이 없앨 수 있으니 쾌감마저 느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는 흰머리를 보이는 대로 모두 뽑았다간 흔히 말하는 땜빵이 여러 개 생길 지경에 이르렀다. 샤워하러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흰머리를 뽑자고 가자미눈을 하고 달려들면, 너무 집중해 들여다보는 탓에 눈이 시렸다. 또 오랜 시간 눈을 치켜뜨고 있는 사이 이마에 깊은 주름이 여러 개 생겼다.
얼마 전에 결국 미용실에 가서 새치염색을 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내가 '새치염색을 해야 할까요?' 물으면 '어머, 고객님 무슨 말씀이세요. 아직 멀었어요.' 하던 원장님은 그날 내가 같은 질문을 하자 '이제 해야겠네요.'라고 했다.
"흰머리 좀 있으면 어때, 자연스럽게 나이 드는 거지."라고 말하는 사람은 태생적으로 나이가 들어도 흰머리가 없는 사람이다.(내 남편)
"뭐 하러 억지로 염색을 해? 한 번 해서 되는 것도 아닌데 그냥 둬."라고 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충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내 남편)
4.
머리 묶은 고무줄이 팽팽하게 견디다 머리숱을 못 견뎌 끊어진다는 것은 정말 오래전 이야기다. 지금은 두 번, 세 번 고무줄을 동여매도 빈약한 머리숱 탓에 미끄러지듯 흘러내려 풀어지고 만다. 흰머리는 정말, 화가 난다 화가 나. 새치염색 효과는 고작 2주 정도 가는 것 같다.
얼마 없는 머리카락에 흰머리의 지분이 눈에 띄게 늘고 있으니 드는 생각은 '사는 게 내 마음처럼 안 된다 하지만, 머리숱과 흰머리만큼 내 뜻대로 안 되는 게 있을까.' 하는 것이다. 지금 이 기세라면 60대엔 대머리 또는 백발이 되어 있기에 충분하다.
아마 이 얘기를 남동생에게 하면 '에이, 말도 안 돼!'라고 대꾸하진 않을 것이다. 또 '그런가?'라고 할 것이 분명하다. 태생적으로 흰머리가 생기지 않는 사람 또는 굳이 염색할 필요가 있냐고 묻는 사람은 글쎄, '대머리여도 백발이어도 자연스럽게 나이 드는 것'이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여생 모두를 같이 살고 싶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