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104
한 주가 정말 빨리 간다. 요즘은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 규칙적인 생활을 해서 그런 건지, 그냥 체감인지. 어쨌든 오늘은 늦잠을 자지 않고 일어났다. 힘들었지만 아침을 먹으며 정신을 차렸다. 임무 수행도 빠르게 끝내고 조깅을 하러 나갔다. 운동은 시작이 힘든 것 같다. 정말 가기 싫고 귀찮고 춥고 졸리고 그랬는데 뛰다 보니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 안 한 것까지 조금 더 열심히 뛰고 집으로 돌아갔다. 유리창에 비친 내 다리가 참으로 짧았다. 꾸준히 운동하면 기필코 다시 날씬해지리라 믿는다.
점심을 먹고 할아버지께서 유로 마트에 갈 생각이 있냐고 물으시기에 따라나섰다. 가끔 저렇게 내 눈치를 보실 때면 왠지 측은한 마음이 든다. 운 좋게 88번 버스를 바로 탔다. 항상 10분 이상 기다렸었는데. 그때쯤 아빠 친구 분이신 용배 아저씨의 딸 민영이가 프랑스 유학을 생각 중인데 궁금한 것이 있다고 연락을 해보라고 하셨다. 유학이라고 해서 내가 뭘 안다고 조언을 해주나 싶어 조금 망설여졌지만 아빠 친구 딸이니까 라는 이유로 먼저 연락을 했다.
개인적으로 대화를 해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 항상 가족 친목회에서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별 다른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는 사이였다. 대학교 2학년이라고 했다. 벌써 그렇게 됐구나 싶었다. 내가 유학을 생각 중이냐고 물었더니 그냥 살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했던 생각이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나의 모습이 겹쳤다. 도와주고 싶어졌다. 장을 보러 가는 중이라 카톡으로 이야기 하기는 좀 길고, 메일 주소를 알려주면 정리해서 보내준다고 했다. 민영이는 정말 고맙다며 나의 생활에 대해 궁금해했다. 경험자로서 현실적인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도 사야 할 것들이 한가득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대체로 금요일에 유로 마트에 가서 필요한 식재료를 사는데 뭘 이렇게 많이 사나 싶으면서도 일주일 뒤엔 또 그만큼 사야 할 것들이 생긴다. 언니가 손이 큰 건지 우리가 잘 먹는 건지. 아마 후자는 아닐 듯. 잘 먹는 건 나 하나니까. 돌아갈 때도 운이 좋게 버스가 금방 왔다. 항상 정류장을 잘못 찾아 버스를 놓치거나 한참 뒤에 오는 버스를 기다리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운이 좋았다. 자리도 있어서 편히 앉아 갈 수 있었다. 사람들이 꽤 많이 타고 내려서 중간에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아주머니께서 나에게 자리를 양보해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는데 내 앞의 아주머니께서 일어나서 그곳에 앉으셨다. 나도 짐이 많아서 비켜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집에 도착해서 불어 공부를 먼저 했다. 저녁에 루브르 박물관 야간개장을 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민영이에게 메일을 썼다. 시작은 어색하게 우리 둘의 관계에 대해 썼고, 하나씩 준비 과정부터 생활 그리고 내 생각을 정리해서 썼다. 그런데 너무 할 말이 많아서 조금 뒤죽박죽인 것 같았다. 잘하고 있는 건지, 확신이 없었지만 무려 두 시간이나 고민해서 메일을 작성했다. 꽤 긴 분량이 나왔다. 아무래도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 많아진 것 같다. 그리고 진짜로 도움이 되고 싶었다. 혼자서 워홀을 준비하면서 의지할 곳이 아무 데도 없었던 나와는 달리, 민영이가 나에게 의지해서 작은 정보라도 더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질적으로 프랑스에 온다면 내가 생활면에서는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없지만, 그래도 선배로서 현실적인 조언은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곳 생활이 100퍼센트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 최대한 현실적이게 썼다. 프랑스가 아니더라도 그 어떤 나라에라도 가보는 것 자체가 큰 경험이니까. 나는 그녀의 꿈을 응원한다. 그렇게 한참을 걸려 메일을 보내니 5시였다.
이후 아망딘느가 와서 임무 수행을 마치고, 저녁을 기다리는데 할아버지와 언니가 싸우셨다. 불편한 분위기에 저녁을 거르고 루브르에 갈까 생각하던 중 할아버지께서 집을 나가셨다. 언니와 둘이 밥을 먹어야 해서 더욱더 불편해졌지만 슬슬 배가 고파졌기에 루브르는 포기했다. 할아버지께서 나가시면 언니와 내가 둘이서 밥을 먹기 때문에 할머니를 먼저 드리느라 식사 시간이 조금 늦어진다. 7시가 조금 지나서 밥을 먹었다. 먹는 도중에 할아버지께서 오셨다. 개선문 아래에서 작은 행사가 있었는데 참석하고 돌아오신 거였다.
오랜만에 셋이서 밥을 먹었다. 그 어색한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웃겼다. 중간에서 언니와 할아버지의 사이를 중재하며 먹으려니 갑자기 급속도로 밥맛이 떨어졌다. 억지로 남은 잡채를 다 먹고 식기 세척기를 돌렸다. 이미 여덟 시가 넘은 시간. 루브르는 포기했다. 금요일 저녁마다 가려고 했었는데. 나는 아직 미술 작품과 예술 작품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더욱 간절하지 않은 것 같다. 결국 오늘 사진 10장 이상 찍기 미션은 실패다.
내일 밤을 따러 가서 많이 찍으면 되지 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애경 어머니께 연락이 왔다. 전화가 와 있기에 다시 걸었는데 핸드폰이 맛이 가서 소리가 안 들렸다. 결국 문자로 연락드리니 어제 보낸 문자도 중간에 끊겨 왔고, 오늘도 연락이 없어서 안 가려는 줄 아셨다고 했다. 나는 죄송하다고 핸드폰이 오래돼서 잘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아이들 시험기간이 겹쳐 밤 따기가 취소되었다고 하셨다. 나는 내일을 위해서 고무장갑도 사고 간식으로 먹을 브라우니도 사놨는데.
아쉬운 투로 말을 하니 둘이라도 가자고 하셨다. 혹은 다른 아주머니까지 셋이. 나는 좋다고 했고 결국 내일은 나까지 총 세 명이 갈 것 같다. 뭔가 시끌벅적한 소풍을 기대했는데 아마 조용한 산책 정도의 분위기가 될 것 같다. 그래도 좋다. 파리 근교 숲에 간다고 하셨는데 그곳도 기대되고, 파리에서 밤을 따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로. 아주머니 두 분과 함께 간다는 사실은 조금 부담스럽지만 그간 마트에서 쌓아둔 스킬로 잘 섞여봐야지. 내일은 아침 겸 점심을 든든히 챙겨 먹고 나갈 예정이다. 사진이나 많이 찍어 와야지. 밤도 많이 따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