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프랑스인들은 프랑스어만 사용한다.”
어릴 적 우연히 들은 속설 때문에 나는 프랑스에 대한 동경을 가졌다. 자기 나라와 언어에 대한 자부심이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언젠가는 프랑스에 가야지, 불어도 배워야지, 하고 다짐했다. 그 다짐이 꿈이 되고, 그 꿈이 현실이 되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다. 지금 그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처음 워킹 홀리데이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된 것은 대학교에 입학한 2011년이었다.
외국에서 일도 하고 여행도 할 수 있다니, 이름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제도였다. 새내기의 패기로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던 그때, 나의 첫 버킷 리스트를 만들며 제일 먼저 ‘프랑스 워킹 홀리데이’를 적었다.
그리고 3년이 흐른 2014년의 여름, 나는 프랑스 파리에 살았다.
Etape.1 - 고민과 결정
사실 불어 전공자도 아니고, 프랑스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내가 그곳으로 워홀을 떠난다는 건 큰 도전이었다.
막연한 생각을 실천으로 옮겨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2013년 여름방학이었다. 그때는 흘러가는 시간이 두려웠다. 파릇파릇한 스무 살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과 활동에서 자발적으로 소외되는 고학번이 되어 버렸다. 졸업은 코앞인데 진로는 정하지 못하고 삶의 목표도 불분명했다.
나는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학교, 공부, 연애, 아르바이트… 하루하루 똑같은 일상 속에서 그저 바쁘게만 살아갈 뿐이었다.
이대로 학교를 졸업해 바로 취업을 해도 별로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좋아하고 잘하는 건 또 뭔지도 알고 싶었다. 나를 알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더 늦기 전에,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워홀을 통해 시야와 식견을 넓히고, 여러모로 발전한 내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당장 휴학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어서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프랑스에 갈 생각이었다.
먼저 준비 비용과 초기 정착비용을 모으기 시작했다. 부모님께 도움을 받지 않고 온전히 내 힘으로 모으고 싶었다.
그 당시 던킨도너츠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최저시급으로 기껏해야 한 달에 30~40만 원을 벌었지만 매달 20만 원씩 저축해 다섯 달 만에 100만 원을 모았다. 하지만 이 돈으로는 턱도 없었다. 그래서 학기를 마칠 때쯤 곧바로 평일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그리고 부모님께 나의 휴학 결정과 워킹 홀리데이 계획을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스스로 잘해 온 나를 믿는 다며 지지해주셨지만 어머니는 강하게 반대하셨다. 도피성 결정이 아니냐며 나무라셨다.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린 건 사실이었지만 분명히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여러 번의 대화로 진지하게 내 목적의식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출국 전까지도 엄마와의 크고 작은 트러블은 계속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 누구보다도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건 부모님이다. 그런 엄마, 아빠께 항상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tape.2 – 선택과 준비
프랑스 워킹홀리데이는 영어권의 타국가들 보다 상대적으로 정보가 적다. 가장 도움이 되는 건 아무래도 경험자의 후기였다. 프랑스 워홀을 다녀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불어를 못 하면 일을 구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부푼 꿈을 안고 프랑스에 가지만, 대부분 금전적인 문제로 금방 귀국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결국 준비기간 동안 언어에만 몰두할 건지, 돈을 모을 건지 선택해야 했다. 나는 후자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프랑스에 가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살기 위해 일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결코 목적이 될 순 없었다.
‘최소 6개월 만이라도 살아 보자’ 작지만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생활비를 모으기 위해 3월까지는 내리 일만 했다. 하지만 언어를 아예 포기한 건 아니었다. 기초 회화라도 배우자 싶어 프랑스어 학원을 끊었다. 그즈음 운 좋게도 전학기 국가장학금이 추가 수혜 되어 학원비는 따로 벌지 않아도 괜찮았다.
4월부터는 대형 마트 물류 일을 시작했다. 평일엔 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하고, 주말엔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다.
불어는 영어와 발음 체계부터 다르다. 그동안 영어나 일본어 등 제2외국어는 모두 시험을 위해서만 공부했다. 그런데 불어는 나에게 시험이 아닌 삶을 위한 언어였다. 그래서 더욱 재미있었고,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다.
내가 예약한 비자 접수일은 6월 2일이었다. 서류는 5월 초부터 준비했다. 혼자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지만 문제는 ‘비자 신청 동기서’였다. 영어 또는 불어로 작성해야 하는데 나의 외국어 실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자기소개는 학원 선생님께 부탁드려 작성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내용들은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결국 신청 일을 일주일 앞두고 번역 사이트에 돈을 주고 의뢰했다.
그런데 이 동기서 번역 때문에 일주일 내내 골치가 아팠다. 사이트 담당자가 내 문서를 한-영 번역으로 잘못 처리한 것이었다. 결국 영어 번역본을 다시 불어로 번역하느라 시간이 더 걸렸고, 초반에 잘못 계산된 금액 때문에 추가적으로 돈을 더 보내야 했다. 게다가 내가 수정을 요청한 부분이 반영되지 않아 여러 차례 피드백을 해야 했다.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드디어 비자 접수 날이 오고, 대사관에 가 마지막 순서로 서류를 냈다. 혹시 잘못되어 전화가 올까 봐 그 뒤로 휴대폰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다행히 일주일 만에 무사히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택배 전화를 받던 그때의 기분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차고 기뻤다.
(2)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