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잠
장대비가 스쳐간 오후, 풀숲이 숨죽인다
고랑엔 빗물이 괴고, 잠자리 한 마리가
수면 위에 멈춘다
어렴풋한 기억 속 어린 날
잠자리를 잡으려다 놓쳤던
비가 그친 오후
할머니는 젖은 손을 털며 말했다
"얘야, 붙잡으려 하면 사라진단다, 그냥 바라보렴"
그때는 왜 모든 걸 쥐고 싶어 했는지 알지 못했다
손에 쥘 수 없는 것들로 인해
물속에 잠든 물고기처럼
오래 숨을 참았을 뿐이다
생각이 자라, 눈을 뜬 어느 날
나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는 걸 알았다
자라는 동안 사라진 것들이야말로
가장 오래 남는다는 것도 알았다
빗자국처럼, 할머니의 목소리처럼
내 안에 고여 있다는 것을
오늘 다시 풀숲에 선다
그 잠자리의 날개 위
잠든 나의 시간이
할머니의 물가를 서성인다
# 작가 노트
할머니가 살던 집 마당 끝 풀숲에는 언제나 할머니의 시간이 깃들어 있다.
처마 밑에서 수건을 짜며 나를 부르던 눈빛, 수련 핀 웅덩이 곁에서 묵묵히 허리를 숙이던 뒷모습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투명한 잠자리처럼 앉아 있다.
오늘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나는 다시 그 여름의 아이가 되어 오래 숨을 참는다. 그리고 할머니의 시간을 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