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데이트, 이렇게 해보세요

다섯 살 손자에게 하루를 맡겨봤더니

by 혜솔

요즘 날씨가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고, 낮이 되면 제법 더워지곤 한다. 외투를 챙겼다가 벗게 되는 하루. 계절이 망설이면서 봄의 중간 쯤으로 나아가고 있다. 주말 아침, 나는 손자와 둘만의 데이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일정이 아니고 하루를 아이에게 맡겨보자 생각했다. 손자 로리에게 오늘 가고 싶은 곳이나 하고 싶은 게 무어냐고 묻자 망설임이 없이 말한다.


"점심은 식당에 가서 돈가스 먹고 싶어요."


그리고 이어서 다음 일정을 이야기 한다. 도서관 가서 책 열 권 읽고, 살구꽃 공원으로 가서 산책하자고. 아이의 하루는 단순하고 분명하다. 나는 그 계획을 그대로 따라가 보기로 했다.

가볍게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아파트 울타리를 벗어나자 햇살이 환하게 쏟아졌다. 거리엔 파릇파릇하게 싹들이 올라와 드문드문 초록빛을 띄고 있었다. 길 모퉁이의 철쭉이 봉우리를 내밀고 땅 위로 노란 민들레가 방긋 웃는, 봄 날 오후를 천천히 걸었다.


"할머니! 달처럼 예쁜 민들레가 여기도 저기도 많이 피었어요~"


로리가 신나게 소리쳤다. 그런데 몇 발자국 못 가서 뒤 돌아서더니 "어? 누가 여기에 아이스크림 먹고 쓰레기를 버리고 갔잖아? 꽃이 싫어하겠지?"라며 쓰레기를 주워 들고는 나를 쳐다본다.


"할머니 가방에 비닐봉지 있어? 이것 좀 담자."


내가 웃으며 비닐을 꺼내자 로리도 웃는다. 걸어가면서 길섶에 떨어진 휴지나 플라스틱을 주워 담는 로리. 날이 따뜻해지면 다시 플로깅을 시작 하자더니 나온 길에 하게 생겼다.


도서관 앞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로리가 또박또박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분식집 아주머니가 웃으며 맞아주었다.


"오, 꼬마손님 어서 와요. 오늘 멋진데요?"


돈가스를 먹겠다던 로리는 메뉴판을 읽어주니 새우볶음밥을 먹어보겠다고 한다. 아이의 선택을 막지 않는 날이니 그러자고 했다. 맛있었나보다. 로리는 많은 밥을 끝까지 다 먹었다. 중간에 물이 필요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정수기로 가 컵에 물을 받아오기도 한다. 그 모습을 보며 아이도 자기가 정한 하루를 스스로 살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주워온 쓰레기를 도서관 쓰레기통에 분리해서 넣은 후 유아 열람실로 들어갔다. 약속대로 책을 열 권 읽기 시작했다. 솔직히 열 권을 읽어주려면 목이 아프기도 하다. 그래도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읽는 이 시간이 나는 좋다. 독서노트에 기록하고, 읽은 책 이야기를 나눴다.

로리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생각이 떠오르면 곧바로 말을 하는 로리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다. 아이의 말은 단순하지만, 그 단순함이 자주 나를 놀라게 할 때가 많다.

로리는 도서관을 나서며 사서 선생님께 인사를 한다. 유난히 로리를 예뻐해 주시는 선생님이다.


"로리야, 어제도 오고, 오늘도 와줘서 고마워. 자주 보니까 너무 좋아."


로리는 또박또박 대답했다.


"유치원에 가니까 로리가 좀 바빠요. 그래서 도서관에 올 시간이 좀 없어요."


그 말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아이에게도 아이의 시간과 아이의 바쁨이 있다는 걸 스스로 느끼고 있었나보다.



우리는 살구꽃 공원으로 향했다. 본격적인 봄 나들이의 절정인 공원 산책이다. 한 낮의 공기는 겉옷을 벗어도 될 만큼 따뜻했고, 햇살은 조금 과하다 싶을 만큼 환했다. 하루 안에서도 계절이 또 바뀌는 듯했다.


공원에는 봄으로 가득했다. 며칠 전에 왔을 때만 해도 꽃잎은 보이지 않았었다. 놀랍다 못해 걱정이 먼저 되는 이 날씨를 어쩌면 좋아, 하면서도 꽃을 보니 마음이 환해 진다. 목련이 활짝 피어 있었고, 산수유가 노랗게 번져 있었다. 땅에서는 민들레와 제비꽃, 별꽃, 냉이꽃이 얼굴을 내밀고 벌들이 윙윙 대고 있다. 로리는 꽃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할머니, 꽃들이 다 웃고 있어. 재미있는 일이 있나 봐요."


나는 걸음을 멈췄다. 꽃이 피었다고만 생각했지, 꽃이 웃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꽃들 사이에 앉아 있는 아이, 꽃을 바라보며 웃는 아이. 공원에는 많은 꽃이 피어 있었지만, 가장 눈에 들어온 꽃은 로리였다.


아이가 이끄는 대로 하루를 보내며 알게 되었다.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칠지 고민하기보다, 아이가 보고 느끼는 것을 놓치지 않고 함께 바라보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계절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함께 걸었고, 함께 먹었고, 함께 읽었고, 함께 웃었다. 5살 아이에게 하루를 맡겨봤다. 돌아보니, 내가 더 많이 배우고 있었다. 꽃들이 다 웃고 있다고 말하는 아이, 걸으며 쓰레기를 주워 담는 아이와 함께 보낸 오늘. 그것은 봄을 맞이 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이 자라는 순간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