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기(再起)

다시 한번 마음을 동여매고

by 안나

몇 년 전 브런치에서 애주가의 기록, 유의미한 딴짓, 그리고 영어 수필을 닥치는 대로 썼었다. 칵테일에 대한 글을 사실 바텐더는 아니지만, 칵테일이라는 음료가 저마다 사연이 있길래, 그 사연을 내 경험에 빗대어 풀어주려고 쓴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애주가의 기록' 연재를 마치고, '유의미한 딴짓'이라는 반어적 수필 모음집을 쓴 동기 역시 몸부림 - 나는 글부림이라고 지칭한다. - 이었는데,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사무실이란 공간에 들어와 사주와 계약된 시간이 끝나면 그 공간을 벗어나는 구태연한 삶이 참을 수 없이 무료했다. 그 무료함을 '월급'으로 위로하며 나 역시 사회계약론에 대항하지 못한 채, 그 덫에 걸린 불만만 가득차 사회부적응적 월급쟁이일뿐, 당당하게 부조리함과 불평등에 대해 요구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글짓기라는 '딴짓'을 통해 풀어냈었다.


몰입을 빙자한 빙의로 많은 글들을 매일같이 써갔다. 어떨 때는 30분 만에 온갖 정신을 토해내듯 글 한 편을 썼고, 어떨 때는 도화지 같은 이 하얀 바탕화면에 마우스 커서(Cursor)의 끔뻑거림을 오랫동안 응시하며, 머릿속에 글감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렸다. 억지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17시까지 책상 앞에 앉아서 세상 돌아가는 기사를 읽으며 정리하는 이 행위로 족하기 때문이다. 마치 세계 정의를 구현하고 세상을 구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생기없고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는 딱딱한 글을 써주는 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월급으로 묶인 억지스러운 소속감을 벗어나 스스로 온전히 진정하게 그리고 솔직 담백하게 '내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에, 자아를 실현하고 몰입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마음가짐 그리고 이 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떳떳함이 디폴트였다. 그리고 이 마음가짐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내가 떳떳한 글쓰기를 멈추기 시작한 것은 2024년 12월 3일. 마치 '서울의 봄' 영화의 실사판을 보는 것과 같은 비상계엄이 일어났을 때였다. 그때, 처참하게 무너지고 망가지고 망할 것 같다는 두려움과 공포가 어떻게 급속도로 퍼지고 한 인간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지 처절하게 느꼈다. 불안함을 어떻게든 떨쳐내고자 브런치에 한국이라는 나의 조국이 지닌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에 대해 글을 썼다. 그때마다 나는 누군지 알 수 없는 인터넷 상의 안티세력에 의해 애써 부인하는 상처를 참다 참다 결국 브런치를 떠났다. 내가 나름의 혼을 다해 시간과 정성을 들여 쓴 글 100여편을 매정하게 뿌리친채 무책임하게 그렇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난 뒤, 알람 5개로 간신히 일어난 무거운 몸뚱이를 침대에서 분리하여, 하루일과 중 가장 좋아하는 드립커피를 내리며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반복적 일상으로 복귀했다. 마치 마법의 약을 마시듯, '이 커피 마시려고 돈 버는 거지.' 란 생각과 함께 꾸역꾸역 살아갔다. 똑같은 일상. 블루버드 택시를 타고, 똑같은 루트를 통해 도착한 사무실 로비. 그리고, 그 로비에서 매일 똑같이 인사하는 경비원님들의 온화한 환대를 뒤로하고, 23층 사무실에 매쾌한 매연으로 도시전체가 휩싸인 자카르타 시내를 보며, 그렇게 죽지못해 살아가는 시간을 보냈다.


브런치를 떠난 지 8개월째. 다시 한번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난잡한 불평등과 정보차단, 불통, 차별로 마음속에 불만이란 화병이 쌓이기 시작했다. 상사를 보면 화가 치밀었고, 내 눈치를 살피던 그는 "도대체 요즘 왜 그러는 거야? 무슨 일 있어?"란 질문을 했다. 그 짜증나는 질문에, "회사 다니기 싫어서요."라고 말해버린 그날, 정신과 상담을 다시 시작했다. 정신과 상담 그리고 불안장애와 수면장애를 다스리기 위한 온갖 알약에도 불구하고, 이 몸과 마음은 화약성분도 항복할 만큼 거대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어떻게 마음의 스위치를 켜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몇 달을 방황했고, 그때마다 내가 비정하게 뿌리치고 온라인에 버렸던 글들이 생각났다. 그 많은 글들은 나의 슬픔, 사랑, 분노, 번뇌, 그리고 흔치 않지만 희망들이 그 안에 녹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마음을 동여 잡고, 글을 쓰고자 한다. 일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느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숨결을 불어넣는 일. 가장 순수한 마음가짐으로 그런 글들을 쓰고자 한다. 그 이야기들은 내가 매일같이 만나는 경비원(인도네시아어로 satpam)의 표정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매일아침 내리는 커피 빈의 탄생이야기가 될 수 있으며, 어떨 때는 아프게 헤어졌던 사랑했던 사람이 사무치게 생각나서 밤잠을 설치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글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비판적으로 바라볼 때, 숨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 70년대의 비판적 언어학파(critical linguistics)와 프랑크푸르트 학파(Frankfurt School)의 말처럼, 나는 인간의 모든 생각과 말, 그리고 이것들이 모인 '세상의 일'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당연하지 않은 담론이라고 보기 때문에, 이것들을 헤쳐하여, 그 면면을 살펴보는 그런 글들을 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