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고 불편한
프리랜서 둘이 산다는 건... 같이 보낼 시간이 무척 많다는 뜻이다. 그건 정말 행복하고도 불편한 일이다.
나는 그래도 정해진 일의 루틴이 있었다. 이주일 간격으로 한 번 녹화를 하고 하루 이틀 대본을 쓰고 또 하루 이틀은 온종일 자막 작업에 몰두해야 했다. 사실 쉬운 일은 아닌데 6년째 알토란이란 같은 프로그램을 하고 있던 터라 척하면 척이었다. 큰 변수가 생기지 않으면 일주일에 2~3일만 출근했다. 물론 집에 있다고 일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틈틈이 섭외를 하고 회의를 하고 출연자들과 내용을 상의했다. 그렇게 보면 출근만 안 할 뿐이지 실제로 쉬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매일같이 선후배 작가들과 연락을 하며 진행 상황을 공유해야 했고 또 피디들이 원하는 바에 맞춰 끊임없는 수정 작업을 해야 했으며 그 과정에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많이 겪어야 했다.
승현의 스케줄은 들쭉날쭉했다. 어느 주는 하루도 쉬는 날 없이 강행군으로 달려야 했으며 어느 주는 일이 하나도 없어 소파에 붙박이처럼 붙어있었다. 어느 날은 출근하며 봤던 그 자세 그대로 내가 퇴근할 때까지 밥도 안 먹고 그대로 있었다. 연예인들이 우울증에 쉽게 빠지는 원인이 이러한 무력감이 아닐까 싶었다. 대중들의 시선을 받을 땐 한 없이 떠오르다가 일이 없을 땐 몇일이고 몇 주고 가라앉는... 돈을 벌고 안 벌고의 문제와는 별개로 감정적으로 조절을 잘해야 하는 직업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승현을 두고 출근하는 날엔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약속도 잘 잡지 않았는데 피할 수 없는 약속도 잡아 놓곤 번번이 깨곤 했다. 후배들에게 말했다. 꼭 정상적으로 출퇴근하는 남자를 만나. 그게 편해.
아무튼 우리는 함께할 시간이 많다 보니 오늘은 뭘 먹지? 오늘은 뭐하지? 에 대한 의견을 항상 맞춰가야 했다. 뭘 먹느냐 문제에 대해서는 승현은 나에게 져주지 않는 편이었다. 나는 삼시세끼 조금씩 뭐라도 대충 챙겨 먹어야 하는 편인데 승현은 내내 굶다가 하루 한 끼 겨우 챙겨 먹는 스타일이라 그 한 끼를 뭘 먹는지 그에겐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미혼 시절 소개팅할 때도 파스타 같은 건 별로라고 삼겹살에 소주나 먹자는 노포 파인데 승현은 이탈리아인 피가 섞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레스토랑 파였다. 나는 일 년에 한두 번 먹을까 말까 한 파스타, 피자, 햄버거를 거의 주식으로 먹어야 했다. 그러다 도저히 못 먹겠다 화를 낸 적도 있었지만 승현은 굽히지 않았다. 하루는 햄버거를 먹고 나왔는데 다른 집 햄버거를 또 먹겠다고 해서 거의 돌아버릴 뻔했던 적도 있다. 이게 별 거 아닌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거의 매일 붙어 있으며 매 끼니를 뭘 먹을지 조율하는 문제는 서로의 기싸움과 자존심 싸움으로도 이어진다. 고로 굉장한 에너지가 사용된다.
또 나는 승현을 만나기 전엔 쉬는 날엔 무조건 집에 있는 편을 택했다. 씻지도 않고 너저분하게 있으면서 밀린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이나 웹툰을 몰아 보는 게 낙이었다. 종일 아무도 안 만나도 괜찮았다. 이미 밖에서 치일 만큼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에너지를 썼기에 오롯이 혼자서 충전하는 시간을 갖는 게 좋았다. 하지만 승현은 항상 나가기를 희망하는 쪽이었다. 스케줄이 없을 때 한없이 침잠되었을 그를 생각하며 나는 피곤하더라도 같이 길을 나섰다. 또 여기서 우리는 취향이 나뉘었는데 나는 항상 조용하다 못해 으슥한 곳을 좋아하고 승현은 항상 사람들이 많은 곳을 선호한다. 또 식당이나 카페에서 나는 구석진 자리에서 안정감을 찾는데 승현은 얼굴이 알려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모두와 눈을 마주칠 수 있는 개방된 자리를 좋아한다. 나는 대부분 승현의 의견을 따라주는 편이지만 그러한 부분이 불편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승현을 알아보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나한테도 꽂히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이나 브런치 같은 온라인은 내가 선택적으로 걸러서 보여줄 수 있지만 오프라인에선 그러하지 못하니 조금 더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다. 하지만 승현 앞에선 불편하지 않은 척한다. 내가 불편해하면 승현도 불편해질 테니까. 자유롭지 못한 삶이 더 자유롭지 못하게 될까 봐.
가장 날 괴롭힌 문제는 바로 생리현상이었다. 여러 생리현상 중 특히 가스 배출 문제가 심각했다. 조용히 해결하고자 화장실에 들어가 물을 틀어놓았지만 심리적 압박감 때문인지 도저히 배출하지 못하는 나날들이 이어지고 어느 날은 어지럽기까지 했다. 결혼한 친구들에게도 자문을 구했는데 신혼초엔 좀 그렇지~하고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승현과 나처럼 24시간 일주일 내내 붙어있는 경우는 드문 일이니 나처럼 심각하게 가스 배출 문제를 두고 고민하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하루는 정말 배가 팽창했다는 기분까지 들은 상태에서 불편하게 잠이 들었는데 나도 모르게 뽀오옹~ 혹은 그런 소리보다 조금 더 격하게 내 의도와 상관없이 가스가 배출되었다. 황급히 잠에서 깨 승현을 바라봤는데 승현도 소리를 들은 듯 뒤척였다. 나는 눈물이 났다. 내가 가스 배출 따위의 일로 이 고통을 겪다니 내 노력이 가상하면서도 어쩐지 서러웠던 것 같다. 바보같이 훌쩍거리고 있는데 승현이 날 도닥이며 괜찮다고 말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거봐! 들었네 들었어!'. 승현이 스케줄이 있어 나가고 나 혼자 집에 있으며 마음껏 가스 배출의 자유를 맛본 날이면 조금 살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승현이 언제 들어오려나 기다려졌다. 얼마 전 승현과 술을 먹다가 조금 취해서 사실은 가스 배출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을 꺼냈다. 그리고 당신은 방귀도 안 뀌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승현은 한 번도 소리를 낸 적 없고 불편한 기색도 없었기 때문이다. 승현은 그날은 조용히 웃었다. 그러고 며칠 뒤 자다 깨 안방에 달린 화장실을 간 승현은 경쾌한 가스 배출 소리를 들려주었다. 그게 뭐라고 나는 피식 웃었다. 그 이후로도 승현은 종종 그렇게 했다. 마음이 비로소 편해지고 나는 화장실에서만큼은 편안하게 가스 배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불편한 문제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해결되는 듯하다. 지금 나는 일을 그만둔 상태라 승현과 같이 하는 시간이 더 많은데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왜 모든 걸 함께 해야 하지? 이제는 승현이 나가자고 하면 난 집에 있을 테니 나갔다 오라고 한다. 승현도 내심 그게 좋은지 내가 말을 번복하기 전에 호다닥 나간다. 그러곤 밖에서 실컷 에너지를 얻어가지고 들어온다. 승현이 없는 시간 나는 또 나 나름의 자유를 맛본다. 나도 언제고 나가고 싶으면 나간다. 승현이 소파에 누워 한 자세로 열 시간을 있던지 스무 시간을 있던지 본인의 마음과 정신은 본인이 컨트롤하는 거지, 아내인 내가 함께 있다고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걸 알았다. 그리고 살다 보니 승현은 그냥 좀 게으른 부분이 있는 거지 우울한 인간형은 아니었다. 서로 꽤 자유로워졌다. 또 둘이 무엇을 먹네마네 고민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한 번은 승현이 원하는 것, 한 번은 내가 원하는 것을 같이 먹어주는 게 암암리에 법칙처럼 정해졌다. 완벽하게 하나이고 싶었으나 사실상 그것은 너무나 피곤한 일임을 알게 되고 서로 교집합 정도만 공유하며 따로 또 같이 사는 기술을 터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