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토박이이자 거제를 벗어난 적이 없어 직접 듣는 서울말이 여전히 신기하다는 젊은 사장님의 입에서 나온 낯선 단어에 옆에 앉아있던 멤버에게 물었다.
"테라리움? 그게 뭔지 알아?"
"아니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미니 화분을 있어 보이게(?) 부르는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눈앞에 마련되어 있는 준비물과 사장님이자 강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보틀가든(bottlegarden)이라고도 불리는 테라리움(terrarium)은 유리병 속에 돌과 작은 식물, 이끼를 넣어 꾸미고 재배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농원에 들어올 때 보았던 진열대에 있던 유리병들이 테라리움이었던 것이다. 이래서 아는 만큼 들리고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 것인가. 그러니까 나는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진만 찍은 셈이다.
만드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가장 먼저 강사님이 미리 준비해 놓은 색과 크기가 다른 돌들 중 원하는 색상의 중간 크기 돌을 바닥에 깔고 그 위로 층을 만들며 여러 돌들을 겹겹이 쌓아주면 된다. 다음으로는 흙을 덮어주는데, 흙을 넣을 때는 앞면이 될 곳에는 적게 넣고 뒷부분을 높게 넣어 비스듬하게 쌓아야 했다. 그래야 그 위로 제법 큰 돌과 식물, 이끼 등을 넣어 꾸밀 때 잘 보이고 예뻐 보인다고 한다.
이제 제법 큰 돌을 깔아주고 그 위로 식물과 이끼를 원하는 만큼 넣으면 된다. 그리고 사람, 사물, 캐릭터 등 아기자기한 소품을 활용하여 유리병 안을 본인의 스타일대로 꾸미면 된다. 나를 포함한 멤버들은 돌을 고르며 어떻게 꾸밀지 고민하다 하나둘 자신의 유리병 속 정원을 꾸미기에 집중했다.
나는 우선 구멍이 듬성듬성 뚫린 돌 세 개를 깔았다. 그리고 그 돌들 사이로 식물을 끼워 넣고 옆으로 이끼를 아주 조금 넣어주었다. 강사님께서 이끼를 더 넣는 것이 어떻겠느냐 말씀하셨지만, 나는 이끼를 많이 넣고 싶지는 않아 이 정도면 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마지막으로 소품을 활용할까 고민하다 이끼는 습한 상태에서 키우면 된다는 강사님의 설명에 우산을 쓰고 있는 토토로를 하나 집어 들었다. 이렇게 나의 테라리움이 완성되었다.
한 명 두 명 테라리움을 완성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돌아다니며 서로의 정원을 구경했다. 그때 강사님의 말이 이어졌다.
"테라리움에는 삶이 담겨 있어요. 지금 나의 기분이나 상태, 성향 등이 반영되기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여러분이 만든 테라리움에는 여러분의 삶이 담겨 있는 거예요."
강사님의 말을 듣고 나의 테라리움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유리병 안을 꽉 채운듯한 큰 돌들. 그 사이를 겨우 비집고 나아와 자신이 가진 초록빛을 뽐내는 식물, 그리고 우산을 쓴 토토로. 이것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것들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 내가 만든 테라리움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강사님의 말을 들어서일까. 내가 만든 테라리움이 어쩌면 나와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삭막해 보이는 주변에도 아랑곳 않고 홀로 외로이 그러나 묵묵하고 꿋꿋하게 초록의 빛을 발하는 모습이.
몇 년 전, '핵심감정 테스트'라는 것을 한 적이 있었다. 한 사람의 행동과 사고, 정서를 지배하는 중심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테스트였고, 여러 항목 중 가장 높은 점수를 차지한 나의 핵심감정은 '외로움'이었다.
외로움[명] :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
사전적 정의 그대로만 본다면 이토록 애처로운 감정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감정 자체에는 좋고 나쁨이 있지 않다. 단지 그 감정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내가 나의 감정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거나 모른 채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게 둔다면 '외로움'은 관계에 집착하거나 자신만의 세계에 갇히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이 감정을 긍정적으로 활용한다면 타인에게 공감을 잘하고 좋은 대인관계를 유지하게끔 만들어 줄 것이다. 나의 경우 후자에 가깝다. 그래서 어린 나에게는 가족이 제일 소중했고, 지금도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
비록 미적 감각이 조금 부족한 편이라 테라리움을 더 예쁘게 꾸미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나를 닮은 이 유리병 속 정원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이 테라리움은 지금 우리 집 화장실에 자리를 잡고 있다.)
오늘의 공식 일정은 이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점심을 먹으러 이동했다. '황 씨네 부자가 운영하는 곳일까? 나는 조 씨니 우리 아버지랑은 조 부자네.' 괜스레 아버지가 생각나는 이름을 가진 이 식당에서 다 함께 점심식사를 했고, 나는 대구탕을 선택했다.
뽀얗고 얼큰한 국물과 살이 꽉 차 큼지막한 대구가 담뿍 들어있는 대구탕이었다. 자연스레 해장이 되는 게 그러려고 의도한 건 아니지만, 전날 저녁에 술을 한잔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깔끔하고 개운한 맛이었다. 게다가 김치, 시금치, 어묵볶음, 달걀프라이 등의 반찬도 제 몫을 다할 만큼 아주 맛났다.
뜨끈한 대구탕을 든든하게 먹은 후, 오후에는 각자 자유시간을 보냈다. 나는 다른 지역을 방문하거나 여행을 갈 때면 그곳의 동네를 돌아다니고 공원을 산책하곤 한다. 그래서 거제에 도착한 날부터 눈여겨보았던 숙소 근처의 중곡 근린공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공원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공원 주변 길에는 '사랑의 길'이라는 이름을 붙인 보행로를 조성하고 조명을 활용해 소소한 즐거움을 주었고, 공원 안으로는 정자, 벤치 등이 군데군데 마련되어 있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기 좋게 되어 있었다. 운동 기구로 운동하시는 어르신, 정자에 모여 다과와 함께 담소를 즐기는 아기 엄마들, 널찍한 공원 한가운데에서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
나도 공원 구석 나무 밑에 놓인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들이켜고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때 한 젊은 엄마와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내 앞을 지나갔다. 남자아이가 어찌나 잘생겼던지 눈길이 자연스럽게 그 아이를 따라갔다. 크고 또랑또랑한 눈에 짙은 쌍꺼풀, 오뚝한 코, 하얀 피부. 흔히 말하는 완성형 얼굴이었다. '제발 이대로만 자라다오.'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남자아이를 쳐다보고 있는데 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도 아이에게 삼촌 미소를 한껏 지으며 반갑게 인사를 해주었다.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순간이었다.
부러운 외모를 가진 아이를 뒤로 하고 공원을 나와 근처 산책로로 걸음을 옮겼다. 발길 가는 대로 걷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지리가 낯설어 중간중간 지도를 확인하며 걸었다. 아파트 단지 앞 분식 포차에는 하교를 하고 가방을 멘 채로 떡볶이와 어묵을 먹는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시간을 보니 어느새 오후 5시 30분이었다.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국거리가 100g 당 2980원"
마트 앞을 지나는데 또렷하고 강한 어조의 거제 억양으로 고기를 파는 소리가 들렸다. 말과 목소리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강한 끌림에 이끌려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물건을 사러 들어온 척을 하며 귀로는 판매원의 목소리와 멘트를 매우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그때였다. 낮에 공원에서 보았던 잘생긴 남자아이의 엄마가 카트를 끌고 생선 코너 앞을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 말인즉슨 그 아이도 함께 있을 터. 그런데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엄마의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역시 그곳에 있었다. 일을 마치고 퇴근한 아빠의 품에 안겨 수족관 앞에서 물고기들을 보고 있었다.
그랬다. 여기는 거제다. 조선소가 있어 그곳에서 일하는 산업 역군들이 많은 거제도였다. 유니폼을 입고 있는 퇴근한 아빠와 장을 보는 엄마, 그리고 그 두 사람의 예쁜 아이. 이 가족에게는 당연한 저녁 풍경. 그리고 어쩌면 이곳에서는 너무나도 일상적인 모습. 그런데 그 일상의 모습이 특별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내 머릿속에서는 영화의 한 장면이 그려지고 있었다.
'부모님도 예전에는 이런 모습이었겠지!? 그들의 청춘도 이와 닮아 있었겠지?!'
문득 부모님 생각이 나서였을까. 괜스레 울컥해지는 기분을 안은 채 마트를 나와 숙소로 향했다. 자유시간을 보내고 귀가한 산이와 귤을 포함해 몇몇 멤버들이 숙소에 있었다. 첫 만남 때는 스텝 겸 멤버인 줄 알았지만, 우리와 같은 멤버인 귤은 나를 포함해 다른 멤버들보다 거제에 조금 더 있었기에 그의 추천을 받아 '윤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엄마손 집밥 전문점'
오늘은 그냥 그런 날인가 보다. 부모님이 생각나고, 삶에 대해 생각해보는 그런 날 말이다. 아무렴 어떤가, 이럴 때도 있는 거지.
윤식당에서 먹는 오늘의 저녁은 해물뚝배기로 결정했다. 조개, 낙지, 꽃게, 새우 등 각종 해산물이 푸짐하게 들어가 시원하고 얼큰한 국물이 일품인 해물뚝배기였다. 게다가 9첩 반상의 반찬들 또한 매우 맛있어 마치 오랜만에 방문한 본가에서 엄마가 차려준 밥상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상차림이었다.
비록 지금은 거제에 있어 부모님과 함께 저녁식사를 할 수는 없지만, 만난 지 며칠 만에 마음 편히 함께할 수 있는 멤버들과 함께 먹는 저녁식사여서 그래도 오늘 하루의 삶이 꽤 즐거이 마무리되고 있는 것만 같아 기분 좋아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