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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Jang Aug 24. 2018

산책 예찬

고여 있는 시간을 흘려보내러

산책을 자주 나간다. 오래된 다가구 주택이 밀집된 동네라 드라마나 인스타그램 속에서 보이는 낭만적이고 모던한 산책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주로 저녁 시간대에 차를 끌지 않고 집을 나서는 일을 산책이라 부르곤 한다. H와 J는 학교와 유치원에, 그리고 나는 회사에 매일매일 나가야 하는 사람이므로 평일 중에는 곤란하다. 주말에는 또 토요일마다 정해진 일정이 있고, 일요일에도 거의 집에 있지 않으므로 동네 산책을 할 수 있는 날은 예외 없이 금요일 저녁, 아니면 토요일 저녁, 내일이 공휴일인 전날 저녁, 드물게 어디 가지 않은 주말 오후이다. 내가 퇴근해서 왔을 때 정해진 생활 규칙 준수 사항 정도 – 저녁식사, 고모가 내준 과제, 유치원 숙제, 놀이센터 과제, 떼를 썼는지 안 썼는지 등등 – 를 살피고 후다닥 저녁 한 숟갈을 뜨고 난 뒤에 대뜸 말하는 것이다.


산책 가자!


그렇게 말할 때 무엇보다 내 기분이 좋다. 억지로라도 내가 만들 수 있는 여유이기도 하고, 아이들이 너무나 신나 하는 것이 절로 느껴진다. TV를 보고 있거나 핸드폰에 코를 박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내가 던진 그 한마디에 아이들은 갑자기 부산해진다. 못다 끝낸 숙제를 마저 하기도 하고, 가지고 나갈 장난감을 고르기도 하고, 스스로 옷을 갈아입기도 한다. 산책 갔다 오면 아직 지키지 않은 약속을 꼭 지키겠다는 공수표를 폴폴 날리기도 하고. 반대의 경우도 있다. H나 J가 먼저 산책을 청해 오는 것이다. 그런 경우는 대체로 ‘산책이라니, 당치도 않을 상황’ 일 때가 많지만 내가 곧 마음을 고쳐먹고 열에 일고여덟은 저녁 어스름 속으로 걸음을 떼놓곤 했다.


2017년 4월 9일 일요일. 동네 어귀 목련.



나는 걷고, 아이들은 바퀴를 구르며 쌩쌩 나간다. 자전거 아니면 킥보드다. 어찌나 당차게 거침없이 나아가는지 그런 에너지로 세상을 밀고 구르며 나아간다면 아무 걱정도 없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 아슬한 속도 속에서 느끼는 쾌감도 아이들 기억 속에 오래 남기를.

그러니 내가 아이들을 앞서 가는 일은 없다. 가끔은 아이들이 멀찌감치 떨어져 걷고 있는 내게 뒤돌아 오거나 내가 곁으로 다가설 때까지 한 자리를 맴돌고 있을 때도 있다. 나와 거리가 너무 멀어진다 싶거나 무언가 미심쩍은 기분이 들 때 그럴 것이다.


괜찮아. 고모 여기 있어.
고모 혼자 어디 가지 않아.
너희를 두고 가지 않아.



2017년 7월 2일 일요일. 씽씽 J.



2017년 4월 15일 토요일. H의 학교 운동장 벤치. 산책은 제스티와 함께.




저녁 산책 길의 끝에 있는 것은 동네 놀이터, 동네 시장, H의 학교 운동장, 조금 더 멀리는 뚝방길 정도다. 놀이터에 가면 나도 잡기 놀이에 뛰어들어 인심 좋은 술래가 되어 주거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아직도 이 놀이를 하다니!)를 외치곤 한다. 시장에 가면 사과 몇 알, 자두 몇 알을 사거나 하프마트에 들어가 아이들은 장난감을, 나는 이런저런 생활 용품을 구경한다. 학교 운동장에서는 함께 시소를 타거나 벤치에 앉아 구름다리를 타고 지나가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뚝방길에서는 누워가는 태양을, 조랑조랑 사연들을 매달고 있는 텃밭 작물이나 분주한 개미 행렬을 구경한다. 고작 이 정도의 콧바람 만으로도 우리는 무언가를 함께 나눈다는 감정으로 충만하다. 애들은 원래 밖에서 놀기를 좋아한다지만 나는 그렇게 느끼고 또 그렇게 믿고 싶다. 아이들을 핑계 삼아 내 욕심을 채우는 것일 수도 있다. 아마 내가 여전히 혼자였다면 이런 산책은 꿈도 못 꿨을 것이다.


2018년 8월 22일 수요일. H는 인지치료를 힘들어하는 중이다. J는 잠이 들고, 바람 쐬고 싶었던 H와 함께 나온 동네 놀이터.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가 지나온 길 어딘가에 아직 고여 있는 시간들이 힘 빠진 내 걸음걸음, LED 불빛 반짝이는 킥보드 씽씽 바퀴, 따릉따릉 자전거 페달을 타고 슬렁슬렁 풀어 흩어지는 것 같은 기분 들어 점점 더 좋다.

 

잊기를,

떠올라도 담담히 아프지 않기를.

걷다가 아름다운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아이가 되기를

달리다가 바람이 전하는 소리를 마음으로 듣는 사람이 되기를

나무와 풀, 꽃과 강아지와 친구 할 수 있기를.

그런 어른,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은 고모처럼.

그리고 사실은 말야


고모는 날마다 날마다 산책하고 싶어 ^o^


2018년 8월 22일 수요일. 동생 떼놓고 나온 게 걱정이 됐는지 재차 묻더니만 곧 집에서 전화가 왔다. "아 고오모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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