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나 Dec 01. 2019

나는 아직도 일진 언니들이 무섭다

여행기는 아닙니다 1 

“선생님, 지금 하는 수업도 정말 좋은데요, 저는 수진이나 다른 학생들이 어떻게 하는지 딱히 신경 쓰지 않아요. 우선 기본적인 것부터 더 탄탄하게 잡고 싶어요.”


실수했다. 과외를 받는 언니들 중에 가장 월등한 실력을 보이는 영이 언니의 학업 성취도를 높이고자 은근슬쩍 다른 언니는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단어도 많이 외우고요, 저랑 수업하는 3시간 동안 정말 열심히 하고 있답니다,라고 운을 뗐더니 바로 저런 대답이 돌아왔다. 청소년기에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는 최고의 인기인이었음이 분명한 영이 언니는 경쟁만이 미덕이라 생각하고 살았던 내게 참 예의도 바르게 그 입을 닥치라고 경고했다. 어쩐지 첫 인상부터 보통이 아니더라니. 그녀는 누가 봐도 일진으로 태어나 일진으로 눈을 감을 운명을 타고난 여인이었다. 스무 살 무렵 잠시 패션 모델로 일한 적이 있다는 영이 언니는 내 허리까지 오는 긴 다리에 자그마한 얼굴로 첫 만남부터 강렬한 인상을 준 사람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대꾸를 허용할 것 같지 않은 표정을 가진 영이 언니는 쉬는 시간마다 담배를 피우며 영어 수업에 대해 궁금한 사항을 물어봤다. 수업을 시작한 지 두 달이 지난 지금도 나는 차렷 자세로 대답하곤 한다. 


언니는 간혹 내가 알지 못할 것이라고 짐작하는 어려운 단어들도 물어봤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추리 및 의학 드라마에 한동안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정형외과’같은 단어도 알고 있었다. 이제까지 그 어떤 학생도 이런 단어는 물어보지 않았는데. 3초 정도 고민하고 대답을 하자 내가 대답을 못하고 쩔쩔맬 것을 기대하던 그녀는 아쉬운 기색을 잠시 내비쳤다. 에이, 모를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모르냐며 놀려주려고 했는데. 언니가 내뿜는 담배 연기를 맡으며 잠시 식은 땀을 훔쳤다. 그녀는 진성 일진이었다. 사실 비밀인데, 나는 예나 지금이나 일진 언니들을 무서워한다. 그러니까 쎈 언니들이 무섭다. 


선배들에게 학교 옥상에서 야구 방망이로 뚜드려 맞았던 과거는 없다. 학생들의 성적이 떨어지는 것을 북한의 침공보다 두려워했던 강남 한복판의 사립 여고를 졸업했기에 일진 언니들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학생 주임 선생님이었다. 김경자 선생님은 늘씬한 다리를 자랑하며 미니 스커트를 입고 다니셨고 복장이 불량하거나 아주 조금이라도 화장을 한 여학생들을 보면 지체없이 따귀부터 날리셨다. 그 매운 손에 출석부가 들려 있는 날에는 그 두꺼운 출석부로 뚝배기를 후려 갈기셨다. 학생들한테 고소미는 드시지 않으셨는지 궁금하다. 


다소 무섭긴 해도, 마음에 안 들면 욕부터 나오긴 해도, 일진 언니들은 뒤끝이 없다. 내가 영이 언니의 저 말에 우물쭈물하며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남은 수업 내내 더 크게 웃고, 더 많이 이야기하며 혹여 내 기분이 상하지 않았을까 배려해준 것도 알고 있다. 나도 이런 쎈 언니가 되고 싶었다. 늘씬하고 시원시원한 인상을 가진, 무슨 얘기도 할 수 있고 또 어떤 말이든 잘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그리고 무엇보다 독한 미제 담배도 근사하게 필 줄 아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물론 현실의 나는 구부정한 어깨에 안경을 끼고, 3년 전에 들었던 사소한 욕까지 기억하며 앙심을 품고 사는 쭈구리이지만 말이다. 가끔 멋모르는 남자애들은 터프한 나의 말투에 누나는 참… 예상 외의 성격이시네요,라고 말끝을 흐린다. 야, 니가 진짜 무서운 누나를 못 만나봐서 그래 짜샤. 눈 깔어. 

작가의 이전글 독립출판 서점에 입고가 되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