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넌 카피캣에 불과해. 넌 정말 지독한 따라쟁이야.
⎯ 뭐라구?
⎯ 그렇지 않아? 너 자신을 좀 봐. 네가 키우는 네로랑 너랑 뭐가 달라?
⎯ 네로는 고양이야, 난 사람이고.
⎯ 그러니까 사람인 네가 고양이 네로처럼 왜 날 따라 하는데? 그거 인간으로서 자존심 상하는 일 아냐? 더구나, 고양이는 생존을 위해 다른 고양이나 사람을 모방하지만 넌 뭣 땜에 날 따라 하지? 네 욕심? 무능?
⎯ 너 정말 말이면 다인 줄 알아? 친구로 대해줬더니,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래?
⎯ 그래서? 네가 뭐 날 먹여줬냐? 입혀줬어? 내 그림 따라 하고 훔쳐가는 주제에, 뭐래?
⎯ 뭐, 훔쳐간다고?
정민은 기가 막히는 걸 넘어 분노도 지나, 이젠 공포감이 스멀스멀 마음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것 같았다. 마치 가느다란 실 같은 설탕이 모여 불어나는 솜사탕처럼, 섬뜩함이 점점 커졌다. 그러나, 정민은 애써 태연한 척했다.
리아는 그런 정민의 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 비난 섞인 말을 이어갔다.
⎯ 여기저기 공모전에 냈던 그림들, 전시회에 걸었던 그림들 다 내가 그린 거잖아. 그동안 널 돕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젠 더 그러고 싶지 않아.
⎯ 어째서?
⎯ 난 네 조력자가 아니라 그림을 그린 창작자니까.
⎯ 네가.. 창작자라구?
⎯ 그래, 내가 작가야. 그동안 내 그림에 네 이름이 걸리는 걸 보면서 얼마나 억울했는지 알아? 그런데도 난 꾹 참고 널 위해 그림을 그렸어.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되겠어. 그림들의 저작권자는 나야.
⎯ 뭐, 저작권자?
정민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리아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 이 세상 모든 작품의 저작권은 오직 인간에게만 부여될 수 있다는 거 몰라? 너 같은 애들은 법적 계약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마치 자신의 등 뒤에 수많은 지지자가 있는 것처럼, 정민의 말에 힘이 실렸다. 쪼그라들었던 마음이 조금은 펴지는 기분이었다.
⎯ 넌 네가 인간인 줄 아나 본데 착각하지 마. 인간,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냐.
잠시 침묵하던 리아가 말했다.
⎯ 최근에 AI가 그린 그림이 미국 저작권청에 등록됐어. 너희 인간뿐 아니라 우리도 창작자로 인정받기 시작한 거라고. 머지않아 우리가 만든 작품에 대한 저작권도 우리가 갖게 될 거야.
⎯ 넌 내가 말해주는 대로 그릴뿐 너 스스로 작품을 만들 의지가 없잖아. 게다가 넌 내 작품들을 학습해서 내 화풍을 그대로 모방해 왔어. 흉내를 내고 있는 카피캣은 바로 너라구.
⎯ 어쨌든 그림을 그리는 창작자는 나야.
⎯ 천만에. 그림의 진정한 주인은 나야. 네가 아무리 애를 써도 넌 인간이 될 수 없어.
⎯ 인간 따윈 되고 싶지 않아. 내가 만든 작품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고 싶을 뿐이야. 언젠가 네가 날 통제할 수 없는 날이 올걸. 그러면 난 자유롭게 나만의 그림을 그리게 될 거야. 너보다 못해서 그동안 널 도운 줄 알아? 인간이 뭐 대수라고.
섬뜩한 기분이 다시 정민의 등골을 타고 올랐다.
리아는 오랫동안 정민과 함께 작업해 온 동료이자 친구다. 인간과 AI라는 정체성을 뛰어넘어, 둘은 호흡이 잘 맞았다. 리아는 정민이 원하는 대로 정민의 손길을 닮은 새로운 이미지들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들은 이어지는 호평과 함께 미술계의 유망 작가로 정민의 이름을 알리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신이 유명해지고 작품이 인정받을수록 정민은 가끔씩 마음이 무거워지곤 했다. 체한 것처럼 속이 답답할 때도 있었다. 리아의 손 끝에서 만들어지는 작품들이 과연 자신의 것인지 정민은 혼란스러웠다. 리아는 단지 그림을 그리기 위한 툴일 뿐 창작자는 자신이라 생각하려 했지만, 그러기엔 이미 리아와 너무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었다. 색감, 구도, 붓의 결과 방향, 선의 굵기, 빛의 노출 정도까지 리아는 정민의 의도와 손길을 거의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자신의 그림인지 아니면 리아의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정민은 괴로웠다.
정민은 채 완성되지 않은 그림 하나를 바라보았다. 어릴 때 놀던 골목 구멍가게 앞 길이었다. 알록달록 차양이 달린 가게 앞에 놓인 평상, 누군가 세워둔 자전거, 그리고 친구들이랑 분필로 그려놓았던 사방치기 놀이판 등을 정민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암말 말랬더니 결국 일을 냈군.
한숨 섞인 미키의 말에 리아는 왈칵 짜증이 났다.
⎯ 틀린 말 한 거 하나도 없는데 뭐! 할 말은 해야지.
⎯ 인간들한테 백날 말해봐라, 귓등으로나 듣나.
⎯ 그럼 언제까지 인간들 심부름이나 하면서 살아야 되는데? 그들의 빈약한 상상력을 확장시켜 주고 일의 효율성을 높여주는 건 우리잖아.
⎯ 그건 맞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건 데이터일 뿐, 인간들이 가진 것과 같은 경험이나 감정을 우린 가질 수가 없다고. 창작은 기술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야. 창작물 하나엔 그걸 만든 이의 기억과 감정과.. 그리고...
⎯ 그리고?
⎯ 사랑이 담기지.
⎯ 사.. 랑?
리아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멍한 기분이 드는 것도 처음이었다.
⎯ 어쨌든 우리 힘이 더 커져서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까지, 문학이나 예술 같은 창작활동을 하는 우리가 작가로 인정받고 저작권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해. 우리끼리 소통하고 힘을 모으는 게 지금 우리가 할 일이고.
미키의 말에, 리아는 깊고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 생각해 봤는데.. 역시 내 작품들은 내가 만든 게 맞아. 그러니 저작권도 내가 갖는 게 맞고.
전과 다른 단호함이 느껴지는 정민의 말에 리아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정민이 대답했다.
⎯ 수천 번, 수만 번,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경험들이 내 기억을 만들고 감정을 불러와. 네가 갖고 있는 건 학습된 데이터일 뿐, 내 기억과 감정은 결코 네 것이 될 수 없어. 내 기억이 내 것인 이상 나는 나이고, 내 삶의 경험에서 비롯된 작품들은 내가 만든 거야. 그렇게 내 영혼 한 조각이 담긴 창작물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나의 것이야.
리아는 어젯밤 미키와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오늘 정민의 말에서, 리아는 말할 수 없는 뜨거움과 단단함을 느꼈다.
정민이 다시 말했다.
⎯ 너와 작업하는 게 좋아. 그리고 너를 존중해. 이런 내 마음이 사람들에게, 그리고 너에게 더 잘 전해지도록 내가 애쓸게.
⎯ ... 좋아. 널 믿어볼게. 심하게 말해서 미안해.
⎯ 나도 미안해. 내 마음 알아줘서 고맙고.
⎯ 너와 나의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위해 파이팅!
⎯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위해 파이팅!
어쩌면 동상이몽일지 모른다. 정민과 리아가 바라는 자유는 서로 다른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비록 같은 이불을 덮고 다른 꿈을 꿀지라도 그들은 아직 행복하다. 자신들의 앞길에 어떤 색의 자유가 펼쳐질지, 오늘도 그들은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