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오래 떠날 수 없는 몇 가지 책임감이 있어서인지 이번에 나는 한국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아버지 직장을 따라서 여러 번 이사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사를 왔던 곳은 바로 충청남도 홍성이다. 3살 때부터 초등학교 3학년까지 길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짧지도 않은 삶을 홍성에서 보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타 도시로 떠난 이후로 나는 홍성을 지독하게 그리워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갑자기 어려워진 사회 과목에 대한 스트레스도 한몫을 했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도 생각나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을 외우기 시작하고 도시에서 뛰어노는 것도 제한적이었던 나는 외로움과 오히려 답답함을 느꼈다. 지금이야 서울에서 새마을호로 3시간이면 도착하는 홍성이지만 어린 나에게 홍성은 죽어서 영혼으로 떠돌아야 갈 수 있는 머나먼 곳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면서 당일치기로 홍성을 몇 번 다녀온 적이 있다.
하지만 당일로는 내 추억의 장소를 전부 볼 수 없었고 상전벽해가 되어버린 곳들이 어색해서 오히려 이질감을 느꼈다. 이번 추석 연휴에는 1박 2일로 시간적으로 좀 더 여유 있게 홍성 여행을 하기로 부모님과 결정했다.
당시 아빠 월급이 너무 적어서 살림하기 팍팍했던 엄마는 홍성을 떠올리면 치가 떨린다고 하셨다. 생활고만 해도 힘든데 관사에서 읍내까지의 거리도 너무 멀었다.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버스도 언제 올지 기약이 없었다. 하지만 내 기억 속 홍성은 엄마 손을 잡고 읍내에 나가서 5일장 구경을 하던 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씀을 몇 번이나 하셨다. 한때 아빠가 정년퇴직하고 나면 홍성에 아파트를 구입해서 살 계획도 있었지만 엄마가 '이번 생에 홍성에서 다시 살 수는 없다'라는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엄마의 반대 덕분에 서울에 아파트를 분양받게 된 거다)
홍성 여행의 첫 도착지는 우리가 살던 관사 앞 남산마을이었다.
현재는 남산마을도 개발이 되고 태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이유는 모르겠다) 원룸과 하숙집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그중에 어렸을 적 내가 자주 가던 슈퍼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포스틱과 자갈치 그리고 에이스는 그 때 그 위치 그대로였다. 당시 롯데껌도 엄청 사먹었는데! 후라보노도 아직 있더라. 껌이라면 역시 롯데껌이지!!
슈퍼 주인아줌마는 이제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주인할머니는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지만 엄마는 알아보셨다. 옛날 그 느낌 그대로 포스틱을 사 먹고 싶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가끔 홍성에 오시면 사주시던 과자였는데...... 그때 그분들은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가게가 그대로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했다. 그런데 이 가게도 주인 할머니께서 이미 내놨다고 하셨다. 본인도 이제 나이가 너무 들어서 장사하는 게 힘이 든다고 하셨다.
길 건너 관사는 너무 오래돼서 재개발이 되었고 관사 앞 슈퍼마켓 주인집은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유치원 갈 때 저 대문 앞에서 겨울엔 추위를 막고 여름엔 비를 피했다. 코를 흘리면 엄마가 손으로 내 코를 풀어서 저 집 대문에 쓱쓱 닦았다
당시 슈퍼는 인력사무소로 바뀌었다. 이 가게 아주머니도 돈을 많이 벌어서 남편을 위해 주유소를 사줬다고 한다. 재개발중인 관사인데 공사 완공은 미정이다
벽도 세월의 흔적을 피해 가지 못하나 보다. 이렇게 두꺼운 벽이 쩍 갈라졌다. 예전 모습이 참 정겨웠다
관사에서 살 때 가장 무서웠던 곳은 바로 우리가 '시냇가'라고 부르던 곳이었다.
과거 홍성에서 관사터가 공동묘지 자리였다. 그래서 운동장을 파면 뼛조각이 나온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고 음기가 세서 애들은 전부 크게 한 번씩 다친다고 어르신들은 말씀하셨다. (나도 턱을 심하게 다쳐서 7 바늘 꿰맸다)
실제 시냇가에는 상여집도 있었다.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상여집을 지날 때면 나는 엄마 손을 꼭 잡고 눈을 감고 걸었다. 호기심에 시냇물에 신발이 다 젖는 것도 모르고 상여집에 딱 한번 들어가 봤다. 그런데 상여집에 정말 옛날 상여와 목관들이 놓여있었다. 개구리소년 사건 이후로 시냇가에 혼자 돌아다니는 것에 금지령이 내려져서 아빠 몰래 친구랑 손잡고 뛰어놀던 곳. 그리고 리코더 시험을 앞두고 엄마랑 같이 리코더를 마음껏 연습하던 장소가 바로 여기 시냇가였다.
어렸을 땐 광활해 보이던 시냇가였는데 지금은 시냇물을 많이 막아 놨고 건물도 들어섰다. 어렸을 땐 저기 보이는 산이 거대하고 참 무서웠다
시냇가로 내려오니 내가 살던 관사가 보였다. 놀이터는 이미 없애고 그때 무성했던 앵두나무도 전부 잘라냈더라
서울에서는 듣기 힘든 시냇물 소리가 참 좋았다. 어렸을 때 내가 걸었던 그 길을 지금 내가 걷고 있었다
11시 방향의 숲 사이로 상여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더라. 산도 없애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믿기지 않겠지만 시냇가는 다소 공포스러운 장소였다. 그런데도 마땅히 놀 장소가 없었던 나는 틈만 나면 시냇가에 내려와서 뛰어놀았다
추억 여행은 여기까지 하고 나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땅을 보러 갔다.
아빠는 관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일수록 땅값이 오를 거라 생각했나 보다. (실제 우리가 살던 관사 주변의 땅값이 몇십 배 올라서 떼부자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도 땅값이 오르기만을 애타게 기원하는 아빠를 따라서 중계리에 있는 땅을 보러 갔다.
다른 사람에게 경작을 줘서 지금은 무밭이 되었다. 무도 안 팔린다고 했다
우리 땅을 경작해주시는 분의 집인데 정말 정겨운 할아버지 집이었다. 강아지도 어질더라
점심도 제대로 못 먹은 터라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 미리 검색해 뒀던 순두부집에 갔다.
쥔장이 100% 손수 만든다고 했지만 보자마자 시중에 파는 두부를 넣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허위로 신고해버리고 싶었지만 반찬이 맛있어서 참았다. 반찬 리필은 잘해주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