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의 소음 속에서 영혼의 자가(自家)를 지키는 법
서울의 하늘 아래 산다는 것은 때로 거대한 파도 앞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롭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집값 소식에, 서울에서 내 집 마련의 꿈을 걷어내고 먼 곳으로 눈을 돌리는 20대 후배들의 뒷모습을 본다. 한편에서는 주식과 코인으로 누군가가 일확천금을 얻었다는 무용담이 들려오고, 다른 한편에서는 투자할 최소한의 종잣돈조차 없어 소외감을 느끼는 이들의 한숨이 교차한다. 각자의 경제 상황을 이야기하는 이들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돈은 많을수록 좋다고들 하지만,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부는 때로 사람의 영혼을 통째로 집어삼킨다. 반대로 돈이 극도로 결핍될 때, 돈은 인생의 주인이 되어 인간을 인간다운 모습이 아닌 오직 욕망만을 쫓는 거인으로 타락시킨다.
우리는 소유가 존재를 압도해 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30대와 40대라는, 인생에서 가장 밀도 높은 책임을 짊어진 여성들에게 이 시대는 유독 가혹한 속도전을 요구한다. 나는 이 지친 조급함을 잠시 내려놓고 싶어, 지난 2월 18일 수요일, 마이아트뮤지엄의 고요한 문을 열었다. <클림트와 리치오디의 기적> 전시장 안에서 만난 풍경들은 나에게 ‘진정으로 머무른다는 것’의 의미를 나직이 일깨워 주었다.
전시장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작품은 알프레도 소레시의 <베톨라의 뮤지>였다. 파스텔톤의 색감이 자아내는 향연은 마치 지친 어깨를 감싸 안는 부드러운 안개 같았다. 안정적인 구도 속에서 강약이 살아있는 붓질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나는 전시장 조명 아래가 아닌 그 평화로운 장소에 함께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사람들은 늘 유명한 것,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에 시선을 뺏기며 산다. 하지만 나는 이름값보다 지금 내 생각과 감정을 건드리는 작품을 더 오래 본다. 타인의 기준이 아닌 나의 내면이 반응하는 지점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때 건드려진 감정은 새로운 연결을 만들고, 뜻밖의 아이디어를 주며, 무엇보다 ‘편안함’이라는 귀한 선물을 건넨다. 당신이 지금 느끼는 그 막연한 불안 또한, 타인의 기준에 나를 맞추려 하기 때문에 생기는 그림자는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전시장에서는 유명한 작가라는 이름표가 먼저 눈에 들어올 때가 많다. 하지만 회화 감상에서 중요한 건, 결국 내가 화면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에 반응했는 가다. 작품 제목이 암시하는 인물(뮤즈, 연인, 모델)은 종종 주인공이 아니라, 관객이 감정을 이입하는 입구가 되기도 하다.
미케티의 캔버스 위에는 붓의 움직임이 경쾌하게 살아 있었다. 제목에 담긴 ‘기쁨’이라는 단어가 관념이 아닌 실체로서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붓질을 따라 마음과 몸이 살랑살랑 움직이는 경험은 경이로웠다. 명절 당일의 고단함이 지나갔다는 안도감과, 마침내 나를 위해 전시를 볼 수 있다는 기쁨이 작품 속 햇살과 버무려져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삶의 지옥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주변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게 된 메마른 상태를 의미한다. 반대로 천국은 지금 이 순간 내리쬐는 햇살의 온기를 온전히 느끼는 찰나에 존재한다. 경제적 불안 때문에 현재의 모든 기쁨을 유예하고 있지는 않은가. 살아있음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눈부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경쾌한 붓터치 앞에서 다시금 배워야 한다.
회화에서 햇살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과 공간을 살려내는 빛의 리듬(명암, 색온도, 반사광)으로 구현되는 경우가 많다. 붓질이 경쾌하게 느껴질 때는 대체로 필치의 방향과 반복이 화면 안에서 일정한 박자를 만들기 때문이다. 관객이 '몸이 먼저 반응한다'라고 느끼는 순간은 눈이 빛을 따라가며 호흡이 바뀌는 순간이기도 하다.
매일 아침, 고요한 빛 속에서 한 자 한 자 필사하며 마음을 누이는 나의 일상이 이 화폭 위에 고스란히 겹쳐졌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수수께끼는 풀려고 애를 쓸수록 더욱 깊은 미궁으로 잦아든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매듭지을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 자각의 순간은 서늘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를 깊은 겸손의 뜰로 인도한다. 내 안의 날 선 고집과 뾰족한 욕심들이 세월이라는 정에 깎여 조금씩 둥글어지고 있다는 것을 작품 앞에서 확인한다. 삶의 모서리가 깎여 나간 자리마다 비로소 타인이 들어올 여백이 생겨나고 있음을 느낀다. 조급함이 당신을 옥죄어 올 때, 잠시 손을 놓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 보길 권한다. 그때 비로소 진정한 평온이 시작된다.
회화의 고요는 침묵이 아니라 화면 속 요소들이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 거리(여백)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여백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시선이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감상할 때는 화면의 주인공만 보지 말고 주인공을 둘러싼 빈자리의 밀도도 함께 보아야 한다.
디자인을 전공한 나의 시선에 이 작품은 완벽한 조형적 은유로 다가왔다. 빛과 그림자의 강렬한 대비는 내 생애의 궤적을 비추었다. 익숙한 구도와 색감이 주는 친숙함 속에, 어두웠던 지난날의 방황과 마흔에 들어 빛을 따라 걷게 된 지금의 내가 투영되어 있었다.
우리는 지금 모두 각자의 밭을 갈고 있다. 누군가는 차가운 모니터 앞에서, 누군가는 고된 일터에서 자신의 미래를 경작한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빛은 어둠이 있을 때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낸다. 지금 우리가 겪는 경제적 박탈감과 미래에 대한 공포는 우리 삶의 구도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기 위한 명암의 장치일지 모른다. 어둠 속에서도 묵묵히 쟁기를 끄는 농부처럼, 우리 역시 고통이라는 그림자를 통과하며 자신만의 빛을 찾아가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이다.
회화에서 빛과 어둠의 대비는 드라마의 장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형태를 읽게 만드는 언어이기도 하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 선명해지고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 역시 또렷해진다. 그래서 명암은 불행, 행복의 단순한 대립이 아니라 삶을 입체로 만드는 깊이의 장치로 읽히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머문 작품은 가족과 관계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다른 방향을 응시하는 남녀, 그리고 각자의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모습.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토록 바쁘게 사는가. 더 많은 숫자가 찍힌 통장인가, 아니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화려한 배경인가. 진정한 인간다움은 거창한 성공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사랑과 신뢰에서 나온다. 가족이라 해도 때로는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는 순간의 침묵이 필요하며, 그 침묵 속에서 서로를 존엄한 인격체로 대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욕망의 거인’이 아닌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 우리가 정말로 소망하는 ‘단 한 가지’는 결국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누리는 평온한 저녁 식사 같은 평범한 일상이다.
인물화에서 등과 뒷모습은 표정을 지우는 대신 관객이 마음을 더 많이 투사하게 만드는 장치가 되기도 하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구도는 합의, 신뢰, 공동의 시간을 상징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다른 침묵을 보여주기도 하다.
전시장을 나오며 나는 나를 짓누르던 조급함이라는 외투를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삶은 정답을 맞히는 시험지가 아니라, 매 순간 마주하는 풍경 속에서 나를 발견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그리고 조급함에 숨이 턱까지 차오른 우리 모두에게 몇 가지 질문을 건네고 싶다.
첫째, 당신을 지금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실제적인 부족함입니까, 아니면 타인과 끊임없이 비교하는 시선입니까? 가난은 불편한 것이지만, 그 불편함이 당신의 마음까지 가난하게 만들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둘째, 지금 당신의 손에 쥐려는 그 욕망은 당신을 자유롭게 합니까, 아니면 당신을 더 큰 감옥에 가둡니까? 돈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버린 순간, 인간은 자신의 얼굴을 잃어버리고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는 괴물이 된다.
셋째, 당신의 삶에서 가장 날 선 모서리는 무엇이며, 그것을 둥글게 깎아낼 준비가 되었습니까?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아름답고, 결핍이 있기에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다. 지금 당신을 괴롭히는 그 불안 역시 당신이라는 작품을 완성해 가는 필연적인 붓질 중 하나다. 부디 스스로를 너무 가혹하게 몰아세우지 마라. 삶의 모서리가 깎여 나간 그 자리야말로, 비로소 진정한 평온과 사랑이 깃들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여백이 될 것이다. 당신의 영혼이 진정으로 머물고 싶어 하는 그 풍경을 외면하지 않는 삶, 그것이 우리가 도달해야 할 가장 인간다운 목적지다.
안녕하세요. 방수진입니다. 요즘 저는 잘 살아내기의 기준이 자꾸 숫자로만 환산되는 세상에서, 잠시라도 나의 속도를 되찾고 싶어 전시장을 찾곤 합니다. 오늘의 글이, 당신에게도 잠깐 숨을 고를 수 있는 고요한 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글에서 다시 인사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