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아닌 두임
리허설이라는 모임에서 연극을 해보았다. '사랑에 대한 5가지 소묘'라는 옴니버스 대본을 읽고 연기하는 시간이었다. 노처녀와 남사친의 사랑, 경상도 부부의 사랑, 시각장애인의 사랑, 암환자의 사랑, 첫사랑과 만난 노 중년의 사랑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소풍을 가고 싶어 했다. 사랑하는 상대에게 개나리 필 무렵에, 예전처럼, 처음으로 소풍을 가자는 고백으로 5가지 이야기의 선을 그렸다. 소풍이라... 처음으로 갔던 두임과의 소풍이 생각났다. 카네이션 꽃상자의 돌돌 말린 만원 지폐를 세면서 히죽히죽 웃는 두임을 보니 바람 쐬러 가자고 말하고 싶었다. 뭐랄까 꽃을 받아 든 그 표정이 꼭 아이 같아서 소풍 가자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두임은 노란 점퍼를 입고 비닐로 감싸논 새신을 꺼내 신으면서 오늘은 밭일을 안 가겠다 말했다.
황강을 가는 차 안에서 나는 두임의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은 친척과도 싸우지 않고 사이가 좋다고 했다. 코로나 때문에 못 갔던 학당도 다시 간다고 했다. 가서 무얼 배우냐 물으니 내 이름, 딸 이름, 아들 이름을 배운다고 하였다. 두임과 함께 있으니 최근에 만났던 사람이 생각났다. 미간 사이에 동전만 한 점이 있어 늙은 신랑에게 시집와 고생했다는 그녀. 남편의 병간호 중 만난 의사가 권해 지금은 점을 뺐다는 사연이 떠올랐다. 어디가 모자라 어디가 모자란 곳에 자리 잡은 두임과 꼭 닮았다. 두임은 늘 그렇듯 요새 밥은 해 먹냐고 물었다. 시어머니와 남편 이야기가 나오면 또 히죽히죽 웃었다. 본인의 시집살이가 좋아서 그랬는지 어떤 마음인지 몰라서 나는 운전에 집중하는 척을 했다.
황강에 도착하니 강물은 봄 햇살에 반짝이고, 바로 옆에는 플라타너스의 연한 나뭇잎이 자라나고 있었다. 참 좋은 봄날이었다. 강 근처 캠핑장에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흐드러졌고 모처럼 소풍에 즐거운 듯했다. 우리는 벌써 물에 몸을 담가 모래집을 만들고 있는 아이들이 보이는 곳에 돗자리를 폈다. 한 편에서는 킥보드를 타고 지나가는 아기를 아빠가 옆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라가고 있었고, 어떤 부모들은 그늘막 아래 캠핑의자에 앉아 나들이 음식을 먹고 있었다. 두임은 뭐가 먹고 싶냐는 물음에도 아무거나 다 좋다고 말했다. 지난번에 제주도 여행에서도 그렇게 말했었다. 특별히 음식을 싸오지 못한 나는 카페에서 믹스커피와 맛이 비슷한 바닐라라테와 주전부리 간식을 한 아름 사와 돗자리 위에 펼쳤다. 김밥이 없는 것이 내심 아쉬웠다. 얼마 전부터 김밥은 나의 소울푸드로 레벨 업을 하여 금방 수준급으로 만들 수 있는데 말이다.
예전에 두임이 싼 김밥은 처음 만든 티가 났었다. 알람이 없이도 새벽 5시에 일어나 내가 사다 놓은 재료들을 열심히 볶았다. 김을 깔고 흰 밥을 펼치고 그 위에 단무지, 미나리, 소시지, 달걀, 맛살을 일정한 간격으로 띄엄띄엄 놓고는 뭉툭한 손으로 돌돌 말았다. 밥알이 달라붙은 칼로 김밥을 썰은 후 도시락통에 담아 참기름을 바르고 깨도 뿌렸다. 나는 첫 도시락을 기분 좋게 열었지만 김 볶음밥이 되어버린 김밥을 숟가락으로 퍼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 이후로 소풍날 아침마다 분식집에서 스티로폼 통에 담긴 김밥을 사 갔다. 두임은 가지나물과 팥이 올라간 찰밥, 미역국은 누구보다 잘 만들었지만 김밥은 초보였다. 시골마을에서 아침 일찍 김밥을 살 수 있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나는 사랑이 담긴 생일 밥상은 금세 잊고 터진 김밥의 서운함을 더 오래 가졌었다.
다시 황강의 모래사장에서 물을 퍼 나르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두임에게 저 강물로 가보자고 팔을 잡아끌었다. 강변 가까이 가보니 모래가 곱게 날리고 있었다. 나는 두임에게 모래 위에 학당에서 배운 이름을 써보라고 하였다. 두임은 나뭇가지 하나를 잡아들고 모래를 평평하게 펴고서 거침없이 이름을 써 내려갔다. 'ㅇㅗ ㄹㅗ ㅁㅜ' 막힘없이 쓴 글자는 요리조리 돌려 보아도 두임의 이름이 아니었다. 글자를 쓰는 두임이 또 아이 같았다. 두임은 멋쩍게 웃으며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해야 한다고 했다. 소풍 나온 지 한 시간 만에 우리의 단순한 대화는 금방 동이 났다. 가족 단톡방에 두임의 사진을 올리고 '너무 좋네, 우리도 다 같이 소풍을 가보자'는 톡을 보내고 두임의 집으로 돌아왔다. 두임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은빛 학당이라고 적힌 연두색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며 아까 말한 숙제를 보여주었다. 공책에는 가나다라, 두임의 이름 그리고 5남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빈칸에 나의 남편 이름을 적어 달라고 하였다. 석자 밑에 혜서를 적고 창환과 창환의 생일을 적어서 내밀었다. 두임은 "이제 우리는 한 식구다"라고 하며 웃었다.
두임은 60년 만에 소풍을 처음 가봤을 것이다. 어릴 적 외가에 갔을 때도 아빠와 택시를 타고 해인사에 갔을 때에도 두임의 모습은 기억나지 않으니 말이다. 두임의 삶을 들여다보면 가엽다가도 자식들을 보면 다행이라 생각한다. 나는 늘 두임과 있으면 웃음이 났고 두임이 없는 곳에서는 눈물이 났다.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도 없고 앞으로의 불안도 아니고 바꾸고 싶은 부분도 없지만 뒤에서는 슬펐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눈물은 부러움이 흐른 것이다. 두임에게는 평범한 김밥, 힘겹지 않은 대화, 복잡한 위로를 기대하지 못했다. 그래도 살아가는 두임처럼 그래도 태어났으니 나도 살아갔다. 모성애는 본능적이고 때로는 동물적이며 당연하다는 생각도 있었다. 두임의 잘못은 아니지만 자식만 많이 낳은 무책임함을 얼마나 비난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소박한 시골에 살아 다행이고 그래도 좋은 어른을 만나 다행이었다. 이제 아이들이 무사히 다 자랐으니 두임도 마음껏 행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