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지독한 냄새가 나는 싸움을 하였다. 나쁜 얼굴에 각진 단어를 골라 아프게 말하고 감정의 늪에 빠져 자칫하면 헤어 나오지 못할 뻔했다. 일주일 동안 겉은 고요하지만 속은 소란스러운 시간을 보내었다. 그 늪에서 나를 구해준 건 과거의 내가 쓴 일기였다.
오늘의 감정: 사랑
요즘 들어 남편과의 관계가 좋다. (생략) 내가 소파에서 잠드니 날 데리러 와줬다. 날 아끼는 게 느껴진다.
2022년 3월 13일
'날 데리러 와줬다.' 이 한마디에 글에 소란스러운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캄캄한 늪에서 날 구원해준 글의 힘을 느꼈다. 강신주 철학박사는 세바시 강연에서 사랑의 본질이 '아낌'이라고 열변을 토했었다. 저 날 보았던 강신주 박사의 열변이 감명 깊었는지 남편의 사랑을 아낌 받았다고 표현하였다. 과거의 감정으로 현재의 나를 다독이면서 풀어지는 상황에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 옆에서 두 손을 가슴팍에 고이 모으고 자는 남편의 사랑스러운 순간을 적고 싶어졌다.
남편과 나는 친구의 소개로 만났다. '인상이라도 좋았으면'이라는 작은 조건을 가지고 그를 만났다. 그는 중요한 순간인 듯 차에서 내려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인상이 좋았다. 나는 거절당하는 내가 두려워서 작정하고 그를 꼬셨다. "음식 뭐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돈가스나 고기를 좋아한다고 거짓으로 비슷한 구석을 만들고, AI리액션으로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웃어줬다. 그때의 나는 대화가 고팠고 고독이 서글펐다. 그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가졌고, 나를 부단히 궁금해해서 대화의 촉촉함이 마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그와의 연애가 시작되었다.
그는 카페 옆자리에 앉아 서투른 향수 냄새를 풍기며 왼쪽 볼을 내 오른쪽 어깨에 폭폭 비볐었다. 맨살이 맛 닿을 때 감촉이 그렇게 좋았다. 호르몬을 자극하며 내 삶에 들어선 그는 부처님처럼 운전을 가르쳐주었고, 손해사정사 공부할 때 자주 옆에 앉았었다. 비행기 안에서 5시간 내내 속닥거리며 이야기를 나눈 첫 사람이자 여행에서도 다툼이 생기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내가 소고기 회식에 애사심이 생긴다고 하니 "자기 나도 소고기 사줄게"라고 다정한 말도 해주어 콩깍지의 유통기한을 늘리기도 하였다. 사랑에 빠지면 분비되는 호르몬인 페닐에틸아민은 유통기한이 있다고 한다. 이 호르몬이 분비되는 동안에 나는 콩깍지를 차곡차곡 저장해두었다. 하지만 3년 동안 저장한 콩깍지를 한방에 날려버리는 결혼을 하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나에게 결혼의 이유나 조건은 없었다. 어떤 사람과 결혼하고 싶은지 물어오면 "나 없이도 잘 살 사람"이라고 대답했었다. 그게 다였다. 술만 취하면 그에게 전화해 (나 없이) 잘살아라고 그렇게 약을 올려댔으니 그 말은 진심인 것 같다. 왜 남편과 결혼했냐고 물으면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드는 유일한 남자였어요"라고 답한다. 대답은 미적지근했지만 그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큼은 확신과 행복이 풍겼는지 지인들은 지금의 남편과 당연히 결혼할 줄 알았다고 하였다. 결혼하고 뭐가 제일 좋냐는 질문에는 선뜻 답이 잘 나오지 않지만 좋은 순간은 내내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속도를 맞추어 있어 주는 것, 집에 돌아왔을 때 강아지처럼 배웅하는 우리, 그가 해달같이 잠자는 모습을 보는 소소한 순간이 좋다. 지난겨울 그는 거실에서 추워하는 나를 위해서 수면양말을 한 뭉텅이 사주었다. 온기가 오른 나는 수면양말을 신고 그가 집에 들어올 때마다 방구석 쇼트트랙을 했다. 동계올림픽에 심취해 신나게 쇼트트랙을 하는 나를 보고 그는 양말 사준 보람이 있다고 좋아했다. 그 앞에서 나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개그를 개봉할 수 있다. 한 번은 힙합의 힙자도 거부하던 그가 내가 틀어놓은 고등래퍼를 보다가 이병재를 알아보았다. 회사 돈으로도 안 먹겠다는 콩나물국밥을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같이 가준 적도 있다. 그의 취향을 거슬러서 내가 스며드는 기분이 들 때 사랑을 느꼈다. 이런 순간들이 겹겹이 쌓여 콩깍지 없는 사랑을 단단하게 한다.
연애는 심쿵 배틀이었는데 결혼은 서운 배틀이다. 서운한 마음에 쏠리다 보면 사랑했던 나는 잊고, 사랑받지 못하는 나를 찾는다. 싸움 후에 생각하게 되는 결혼의 장점은 헤어지지 않는 것이고 단점도 헤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밤이 되면 따로따로 흩어진 우리가 집에서 만나지만 결혼을 선택했기에 그와 이별하누 상상은 하지 못한다. 지독한 싸움에도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 지속하려는 마음을 먹는 순간 무거운 가족의 무게를 알게 된다.
내 환상을 그에게서 다 찾으려 하면 불행해지는 것을 깨달았다. 판타지는 조금씩 모아 만들면 된다. 남편에게 인정받고 싶은 글쓰기는 친구에게 응원받고, 내가 좋아하는 산딸기는 동생이 사주며, 날 찌르는 말은 회사 대리님이 순화하고, 장애가족을 향한 따뜻한 위로는 [우리들의 블루스] 정준 엄마에게서 받았다. 각자가 가장 잘 줄 수 있는 것을 모아 거대한 판타지적 관계를 만들면 된다. 옆에 있는 남편만 줄 수 있는 사랑을 고마워하고 있는 그대로 귀하게 여기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는다. 그는 내 인생의 가장 잘한 일 3가지를 하게 해 준 사람이다. 가장 잘한 일이 '결혼'은 아닐지라도 내 인생 터닝포인트는 그를 만난 것이다. 옆에 있기에 그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