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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먹지 말고, 꺼내 먹어요.

by 헤르만혜서

기차를 타야 한다. 늦지 않게 승강장으로 가야 한다. 길이 너무 복잡해 허겁지겁 뛰어가고 나는 시계를 자꾸 쳐다보고 있다. 헐레벌떡 승강장에 도착했지만 기차는 이미 떠난 후이다. 정신이 번쩍 든다. 아 다행이다 꿈이다. 현실 세계의 휴대폰을 켜고 시간을 본다. 액정 속 시간은 07:50, ‘아뿔싸’ 8시에 빈이를 만나 부산으로 출발하기로 했는데 진짜 늦어버렸다. 브라이덜 샤워와 베이비 샤워를 하기로 한 날 늦어버렸으니 풀 메이크업을 하겠다는 계획은 사치요, 머리감기도 패스, 아이폰 메모장을 열어 1박2일용 준비물 리스트를 하나씩 호명하며 남편에게 짐을 싸달라고 했다.

미래를 대비하라고 쓴 아이폰 메모장 덕분에 나는 늦었지만 덜 바빴다. 그날 착용할 목걸이와 은화의 집들이 선물을 빼먹지 않게 되었다. 나의 메모장에는 까먹지 않고 꺼내 먹겠다는 발버둥들이 기록되어 있다. 메모장의 시작은 2018년 제주 여행 경비였다. 그 이후 남편의 취향과, 결혼식 노래 모음, ESTJ 모음, 하고 싶은 것들, 글쓰기 문장 재료들, 만취의 흔적, 준비물들, 소개팅 리스트, 선물 리스트, 육아휴직 체크 리스트, 아기 이름 후보 등등등을 써 모은 메모가 289개가 되었다.

메모는 30대를 넘어가며 깜박에 좌절하는 일이 많아져 생겨난 습관이다. 매일 챙겨 먹는 갑상선 약을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했고, 블로그를 쓰다가 눈앞에서 기차를 보내 버린다거나 기차 안에 가방을 두고 오는 일이 있은 후부터 알람도 추가되었다. 술을 먹은 후엔 증상이 더 심각해졌다. 거나하게 술에 취해 들어온 고향 집에서 아끼는 구찌 가방을 서랍 안에 숨겨놓았다가 다음날 아침 찾지 못해서 온 집안을 뒤집었고, 술 취해 이야기한 에피소드를 다른 날에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녹음기 튼 거처럼 반복했다는 남편의 말에 놀라 자빠진 게 열 번도 넘는다. 기억이란 ‘자극을 머리에 아로새겨 두었다가, 자극이 없는 상태에서 상기할 수 있는 정신 기능’이라고 하는데, 나는 메모라는 힌트라도 만들어 기억을 해야 했다.

나의 필사의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은 나에게 기억력이 좋다고 한다. 메모하지 않아도 기억하는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요즘 집순이 생활을 하게 된 덕에 요리에 재미를 붙였다. 이상하게도 냉장고 안에 있는 식재료는 구태여 적어놓지 않아도 모조리 알고 있다. 흘리듯 말했던 남편의 근무지가 북삼읍이라는 사실과 남편 동료의 이름, 남편 네 회사 부장의 자식이 5명이고 아침마다 등산하고 출근한다는 TMI도 기억한다. 애써 들어서 기억하는 것인지, 쓸데없는 이야기를 뇌에 넣겠다는 청개구리 심보인지 이상할 노릇이다.

이쯤 되면 나는 잊기 위해 메모한다는 생각이 든다. 햄스터가 양 볼 가능 해바라기씨를 욱여넣다가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집 한구석에 뱉어두는 것처럼. 버거운 할 일들을 메모장이라는 외장 하드에 뱉어두는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해 꺼내 먹는 기쁨을 누린다. 깜박하고 까먹고 잊어버리고 잃어버려도 메모장이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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