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바깥은 여름>을 사 년 만에 다시 꺼냈다. 책 뒷면에는 2017년에 출간된 1쇄 판본이라 적혀 있었다. 김애란 소설가를 좋아하는데 그가 책을 자주 내는 편이 아니어서 소설이 나오면 항상 곧바로 사서 읽는다. 이 책이 나온 때에 나는 직장생활 팔 년 차를 맞이했으며 남편과는 아이가 없는 상태로 결혼 생활을 꾸리고 있었다.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동성이면서 국내 작가인 이의 신작을 십 년 이상 따라가다 보면 한국에 살면서 함께 비슷한 걸 보고 느끼고 있다는 동질감이 피어나는 즐거움이 있다.
작가의 전작 <비행운> 속 ‘서른’에서는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는 허탈함에 공감했고 ‘큐티클’에서는 네일아트를 처음 받은 날 어쩐지 민망하면서도 신기했던 기분을 떠올렸다. <바깥은 여름>도 읽던 당시에 역시나 좋다고 생각했었다. 이 작가는 이제 완전히 어른이 되었구나, 그런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고 기억한다.
<바깥은 여름>을 다시 읽은 건 올해는 정말로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였다. 지난해부터 자꾸 답답증을 느끼던 터라 앞으로 하고 싶은 게 뭔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그래, 항상 소설을 쓰고 싶었지. 박완서 소설가처럼 마흔 살에 등단할 거라 다짐했던 이십 대가 생각났고 그러자 마흔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실감이 숫자로 다가왔다. 언젠가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시간이 덩어리로 생긴다면 꼭 소설을 써야지 했었는데 퇴사와 동시에 아기를 가지게 되며 그 결심 또한 희미해졌다.
더 늦추면 안 돼. 일월이 되면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난 뒤 오전 열한 시에 시작하는 소설 쓰기 워크숍에 갔다. 매주 읽는 텍스트가 달랐는데 선생님이 이번엔 <바깥은 여름>을 읽자 했다. 그게 어디 있더라. 베이지색 문을 열고 들어가는 여자의 뒷모습과 하늘색 벽이 대비되는 표지는 여전히 서정적이었다. 처음 나오는 ‘입동’을 읽는데 갑작스럽게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가 어려웠다. 분명히 전에 읽은 책인데 내가 왜 이러지? 아니, 이 책이 원래 이런 책이었나?
김애란의 단편소설 ‘입동’을 읽으며 나는 세 번 울었다. 한 번은 가족이 평범한 하루를 함께 보내던 걸 묘사한 장면에서였다. ‘욕실 유리컵에 꽂힌 세 개의 칫솔과 빨래 건조대에 널린 각기 다른 크기의 양말, 앙증맞은 유아용 변기커버를 보며 그렇게 평범한 사물과 풍경이 기적이고 사건임을 알았다’는 부분에서 가끔 지긋지긋해서 도망치고 싶어지는 이 너절함이 언젠가는 사무치게 그리워서 회상하게 될 풍경일 거란 예감에 한번 울었다. 오십이 개월이던 영우가 어린이집 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숨졌다는 대목이 나온 뒤 영우 엄마가 화장터에서 아이에게 ‘잘 가’라는 말 대신 ‘잘 자’라고 했다는 부분에서 또 눈물이 고였다.
아이가 몇 살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개월 수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된 후에 알게 된 아이들의 시기별 형태가 구체적으로 떠올랐고 아이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어서 마치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처럼 대하는 마음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이후 복분자액이 튀어 오염된 벽을 덮고자 도배를 하려고 하는데 영우가 자기 이름을 벽지에 써둔 걸, 그것도 채 다 쓰지 못하고 ‘김’ 자와 ‘이응’ 자를 써둔 걸 뒤늦게 발견하고 부부가 오열하는 장면에서 나도 따라 또 울었다.
뒤집지도 못했던 아이가 앉고 일어나고 걷고 말하고 글씨를 연습하는 순서의 평범함이 부모에게 얼마나 유일한 순간인지 나도 이제 안다. 그런 놀라움을 알고 있기에 더 이상 그렇게 감탄할 수 없게 된 마음이 어떨지도 알 것만 같아 책을 덮은 뒤까지 슬펐다. 이건 잘 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그건 잘 모르겠는 상황조차 알 것 같다고 추측하게 해서 한 번에 읽지 못하고 자꾸 멈춰 섰다.
사 년 전에 읽었을 때는 산뜻하게 감탄했던 책이 엄마가 된 뒤에 절절하게 읽히는 걸 보면서 결국 사람은 자기가 살아온 만큼밖에 보지 못한다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했다. 문학 작품을 읽을 때뿐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접할 때도 내가 대충은 알고 있다고 느꼈지만 (심지어 ‘이해할 수 있다’는 말까지 하며 위로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때는 발꿈치에조차 닿지 못하던 상태라는 걸 깨닫고 서늘해질 때가 있다. 아무리 공감 능력이 발달한 사람이라도 간접 경험으로 아는 것은 체험에서 오는 감각의 반의 반에도 가닿지 못한다.
나는 이제 왜 엄마들의 몸이 오랫동안 부어있는지 알고, 왜 머리카락을 어깨 위로 자르는지 알고, 왜 식당에 가면 휴대폰으로 아이에게 영상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지 안다. 남편에게 육아나 집안일에 관해서 부탁하려다가도 어떻게 말을 꺼내면 좋을까 고심하는 자체가 번거로워서 그냥 치워버리게 되는 체념의 순간을 안다.
아이가 귀여운 짓을 하거나, 자거나, 뛰어가는 뒷모습을 볼 때 흐뭇하다가도 이게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로 허락된 유일함이 아닐까 싶어지기도 해서 마음 한쪽이 바짝 조여드는 불안을 안다. 그럴 때면 나뿐 아니라 누구나 그렇게 산다고, 그래도 괜찮은 거 아니냐고 애써 스스로 달래는 순간이 길게 남기고 가는 쓸쓸함의 그림자도 알고 있다.
무언가 알게 된다는 건 이처럼 어떤 일의 표면뿐 아니라 잘 보이지 않는 뒷면까지 보게 되는 것이다. 누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때 예전에는 칭찬하거나 비난하고 말았을 결과의 과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일이다. 아이를 낳은 뒤엔 특히 누군가의 성취를 볼 때 그 사람의 부모가 이전까지 가슴 졸여왔을 시간을 상상하게 된다.
전에는 성공한 사람의 재능에만 박수를 쳤었지만 이제는 안다. 주연이 빛나기 위해선 뒤에서 전기를 끌어다 주고 반사판을 가져다주는 스태프가 항시 있어야 한다는 걸. 책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안다. 스포트라이트는 작가에게만 비추지만 첫 번째 독자이자 그를 북돋아주고 믿어주는 편집자가 없다면 애초에 출간 자체가 희미했으리라는 걸. 그러니 무언가를 알게 된다는 건, 그 뒤의 노고까지 이해하는 것이며 때문에 한 영역에 대해서 함부로 단언하지 못하게 된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엄마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대신 아프고 싶은 마음과 누군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마음과 밤마다 미안해지는 마음과 영원히 너의 뒷모습을 지켜보리란 예감을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몰랐던 감정들을 알게 되면서 나는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기분이 든다. 그건 단순히 내가 감정의 깊이를 더욱 획득해냈다거나 아이의 모습에서 나의 어릴 때를 가늠해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이를 키우며 나는 더욱 민감해진다. 이 아이의 눈에 비칠 세상이 어떨까,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시선을 바꾸어서 다시금 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많은 일들이 매직아이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그저 노이즈로만 보였던 것. 흐려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지만 집중하다 보면 한 순간 번뜩하고 새로운 형체가 벌떡 일어서는 풍경.
그처럼 아이가 보내는 신호와 매일의 미묘한 차이들을 알아내고 익숙한 세상까지 낯설게 보이면서 엄마는 고유해진다. 엄마의 일이 그러하듯 흘려보낸 걸 다시 보고 뒷면까지 넘겨보고 오돌토돌 만져보고 냄새를 맡으며 감각하는 행위들은 내가 에세이 쓰는 법을 가르칠 때 강조하는 비결과도 닿아있다. 소설을 배우면서도 이는 어떤 장르에서든 통용된다는 걸 느낀다.
안도현 시인 또한 더 많이 경험하는 사람, 더 많이 기억하는 사람이 시인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시작법에 관한 책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에서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기억은 시의 중요한 질료가 된다. 삼겹살을 구울 때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며 젓가락만 들고 있는 사람은 삼겹살의 맛과 냄새만 기억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고기를 불판 위에 얹고, 타지 않게 뒤집고, 가스레인지의 불꽃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은 더 많은 경험을 한 덕분에 더 많은 기억을 소유하게 된다. 그런 사람이 시인이다.’ 그렇지. 세밀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