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인 어른이 선택하는 것
지난해부터 만학도 생활을 하고 있다. 대학원 석사 과정을 시작했는데 입학 동기들이 대개 나보다 열 살 이상 어리다. 대학을 졸업한 지 14년 만에 캠퍼스를 거닐다 보니 어색하게 여겨지는 장면이 많았다. 제일 신기했던 건 마주치는 외국인 학생들 비율이 매우 높은 거였다. 특히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 꼭 인천공항에 와있는 것 같다. 문에 붙어 있는 각종 안내문이 한국어, 영어, 중국어로 나란히 쓰여 있어서다. 우리 대학의 국어국문학과 학생회장도 튀르키예인이다.
학교 축제 기간이면 원더걸스와 빅뱅 음악이 주야장천 흘러나오던 나 때와 요즘의 패션이 완전히 다른 것도 흥미로웠다. 내가 새내기일 때는 한 손에는 핸드백을 쥐고 다른 한 손에는 전공책을 한쪽 팔에 끼우고 스키니 바지를 입은 채 앞코가 뾰족한 구두를 신었다. 최근 만나는 여학생들은 거의가 백팩을 메고 운동화를 신고 헐렁한 바지를 입고 다녀서 편안한 멋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학들은 대부분 언덕에 있는데, 스무 살이던 나는 왜 그렇게 발뒤꿈치에 밴드를 붙이고 이리저리 종종거렸나 씁쓸해지기도 했다.
운동화를 신고 백팩을 멘 채 점심시간이 되면 학우들과 학생식당에 간다. 이제 나는 급식의 소중함을 안다. 감사한 마음으로 칠천 원 정도 하는 제육덮밥 정식이나 돈가스 같은 걸 먹는다. 한 번은 “저 대학 다닐 땐 삼천 원이었는데”라고 했다가 옆에서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라 곤란해하는 걸 보았다. 그 후 다름이 부각되는 말을 하지 않으려 조심하고 있다.
나름 신경을 쓰고 있음에도 대화를 하다 보면 차이를 의식하게 되는 일이 생긴다. 학생식당보다 천 원 더 비싸지만 흑미밥이 나오는 교직원식당에서 된장찌개 정식을 먹던 중 여름방학 동안의 여행이 화제에 올랐다. 한 이가 친구와 제주도에 간다길래 내가 차를 오랜만에 모는 것 아니냐고 했다. 이 질문에는 몇 개의 가정이 전제되어 있는데, 제주도에 간다니 렌터카를 빌릴 테고 이십 대 중후반의 학생들이니 아직 차는 없지만 운전면허는 있을 거란 확신이었다. 그런데 같은 테이블에 있던 세 명 모두 운전면허가 없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어보자 이런 대답이 들려왔다. “딱히 필요성을 못 느껴서요.” “알아보긴 했는데 교습비가 너무 비싸서요.” 그중 제일 의아하게 들렸던 말은 이것이었다. “제가 차를… 살 일이 있을까요?” 그는 갸우뚱했다. 차를 갖게 될 미래가 상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반응이 오래 잔상으로 남았다. 나는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운전면허를 취득했는데, 그즈음의 선택이라는 건 매스게임처럼 옆에서 하니 따라 하는 식이라 주변이 대개 비슷했다. 운전면허증은 주민등록증과 함께 성인이라면 꼭 필요한 걸로 생각했고 2종 자동으로도 충분했지만 대부분 1종 보통 면허를 땄다. 당장은 아니라도 너무 멀지 않은 때에 운전할 일이 생길 거라는 게 당시 내 또래의 상식이었다. 그건 가깝지 않아도 까마득하지는 않은 거리감이었다.
면허를 따지 않는 게 요즘의 흐름인 것인지, 국문과 학생들의 경향인 건지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2023년 기준으로 20대 신규 운전면허 취득자는 2020년과 대비해 30퍼센트 감소했고 운전면허 학원이 매해 줄고 있다는 기사가 보였다. 이는 한국만의 변화는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 이십 대의 면허 취득 비율이 낮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실용을 중시하는 Z세대의 뉴노멀 일까? 혹시 너무 아득하게 여겨져서 그런 건 아닐까?
장류진 소설가의 단편 ‘도움의 손길’에는 아이를 그랜드 피아노에 비유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십 평대 아파트에서는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지 않는 게 ‘책임감 있는 어른’이자 ‘합리적인 인간’의 선택이기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기로 부부가 합의했다는 문장이 등장한다.
그랜드 피아노처럼 느껴지는 건 아이뿐 아니다. 포기는 이제 합리적인 어른의 선택이 되었다. 아르바이트생의 역할은 상당 부분 키오스크가 대체했고,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게 되며 직원 한 명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커지자 채용 시장이 더욱 빠르게 닫히고 있다. 그들의 나이일 때 내가 근거 없이 낙관하던 마음을 떠올리면 그때로부터 이십 년이 아닌 몇백 년은 지나온 것만 같다. 이토록 큰 격차 앞에서 어른들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엇부터 해야 할까?
기성세대로서, 아이를 키우는 사람으로서 요즘 내가 자주 하는 생각이다.
[한겨레신문 '대화의 발견'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