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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theyogini Sep 01. 2022

Keep my fingers crossed

1화 운 빨

나는 운이 좋다. 그렇다. 아슬아슬하게 최악은 피했다. 대부분의 경우에.


비록 그것이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큰 깨달음으로 내가 지옥의 나락에서 내 스스로를 구했구나, ( 혹은 하느님, 아버지, 부처님, 할아버지 감사합니다!)라고 알게 될지언정 나는 그렇게 아주 교묘하고도 얄팍하게 그 대 ‘망’ 운들을 피해왔다.


음흉한 미소의 바라나시 게스트 하우스 주인이 만들어준 스페셜 라씨를 (원샷으로 쳐) 마시고 온몸이 마비가 되어 인도 응급실에서 갠지스 강에 태워질 시체들을 마주할 때에도 내 안위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며 너의 신을 만날 때라고 했던 후덕했던 인도 의사 말과는 달리 나는 건강하게 그 병원을 두발로 걸어 나왔다. 내 인생 수베니어인 made in India 엑스레이와 함께.


(심지어 그 넓은 인도 땅에서 동양인 여자 삼인방이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배낭여행 중이었던 친척오빠는 직감적으로 삼인방 중 한 명이 나임을 알아차렸고 병원을 직접 찾아와 병원비도 내주었다. What a small world! 피는 물보다 진한 거다 정말. )


-40도가 육박하는 위니펙에서의 약 10번의 겨울에도 역시 큰 사고는 없었다. 블랙 아이스가 온 도로를 뒤덮어 꽝꽝 얼었을 때도 그리고 그 빙판 위를 트리플 악셀로 시원하게 시전 할 때마다 다행히 (안전하게도) 내 주변에는 그 명장면을 마주할 아무도 없었다. What a loss!


스노우 스톰이 치던 새벽, 무릎까지 차던 눈을 헤집고 출근했던 날에도 앞 차와 ‘콩’ 하는 정도의 충돌 사고가 전부였다. 신기할 정도로. 심지어 내가 멈추지 못해 발생한 이백 프로 내 과실인 사고에도 앞차 운전자는 Are you ladies okay? 라며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나와 내 친구의 안부를 먼저 물었다. Such a gentle man.


하마터면 결혼까지 갈뻔했던  남친   명과도 캐나다  시집살이 지옥의 입구에서 (비록 만신창이가 되었을지언정) 살아서 돌아왔다. Hallelujah, seriously! 아마 참고 견디며 만났더라면 이미 누군가  명이  세상에 사람이 아니었을 거다, 분명. 끔찍해.  




그리고 나는 갑자기 올해 원인을 알 수 없는 어지럼증으로 흔들거리는 세상 속에서 일 년째 살고 있다. 세상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나는 온몸에 힘이 빠져 바닥에 쓰러져 버리지만 이제 전조증상이 오면 어찌어찌 머리를 보호하며 스르르 바닥에 몸져눕는 법을 채득 했다.


그 꼴이 참 우습고 무력하지만, 뭐 어쩌겠나. 죽을병이 아닌 것에 감사할 뿐. 밖에서 쓰러지는 것도 처음에는 보는 눈 때문에 오히려 혼자일 때보다 두려웠지만, 뭐 이것 역시 누군가 나를 위해 119를  대신 불러준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편리하고 감사할 일이다.


일인자 만나기 30 분 전, 마인드 컨트롤. 후 하.


오늘 나는 분당 서울대 병원을 다시 찾았다. 참 많은 사람들이 아프다. 평일 아침시간에도 이렇게나 사람이 많다. 발 디딜 공간도 없이. 심지어 나를 담당하는 우리나라 어지럼증 자타공인 일인자 교수님을 만나려면 자그마치 일 년이 넘는 시간을 기다려야 한단다. (진료는 최대 5분 컷이라는 비밀 아닌 비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지러움 속에서 살고 있는 건지. 답답하다.


환자들의 표정을 살펴본다. 절망, 걱정, 불안, 웃음, 희망. 다양한 얼굴들을 마주한다. 하얀 가운을 입은 어리디 어린 의사 선생님들의 이 커다란 병원에서의 하루를 그려본다. 건강하고 활기차며 스마트한 아우라. 부럽다. 그들의 에너지가 생경하다. 그렇게 수없이 다니는 병원에서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이지만 분명 나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들.


관찰과 상상은 여기까지.




그렇다, 나는 나의 운빨을 믿는다. 이 병은 분명한 인과관계에 의해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고 치유가 될 것이라 믿는다. 병의 원인이 karma에 의한 것이라고 믿는 오컬트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살았던 일인 이지만, 아프고 병을 얻는 것이 누군가의 도덕적인 인과관계의 결과라면 설명이 안 되는 케이스들이 너무 많다. 그러기엔 죽어 마땅할 인간들이 너무 건강하게 살아있다.


그래서 아픈 건 나의 잘못이 아니다. (는 말이 하고 싶은 거다.) 잘못된 삶의 패턴이 나를 병들게 했을지언정 그걸 견디지 못하고 약한 몸으로 약한 면역력으로 태어난 것도 살아낸 것도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 누구를 탓할 일도 죄책감을 느낄 일도 없다. Things just happen. (당신들이 아픈 건, 당신 탓이 아니에요!라고 병원 로비에서 목청 높여 소리치고 싶었다.)


오늘 분당까지 두발로 잘 걸어온 나를 칭찬한다. 날 밤을 새워 퉁퉁 부워버린 눈, 코, 귀. 최악의 컨디션에서 수십 번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눈을 고쳐 뜨고 심호흡을 하며 흔들리며 넘어지며 겨우겨우 도착한 이곳이지만, 잘 왔다. 장하다, 장해.


힘든 검사들도 잘 해냈다. 그리고 침착하게 진료 5분 컷 안에 나의 증상을 설명했고 Q&A 타임까지 나름 알차게 보냈다. Good job!


이제 약을 먹고 차분히 치료를 해 나가는 일이 남았다. 그렇다, 어떻게든 삶은 진행되고 있고 이렇든 저렇든 살아내야 한다. 나는 나의 운빨을 다시 한번 믿어본다. 그리고 검지와 중지를 꼬옥 포개어 Keep my fingers cros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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