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영화 언어의 진화와 비순수 영화에 대하여

영화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

by 이랑

이랑은 이 장 전체를 영화 언어의 성장 서사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저자가 무성영화를 발성영화보다 더 완전한 형태로 평가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발성의 유무가 영화의 본질을 가르는 기준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영화의 핵심은 소리나 대사가 아니라 이미지이며, 시각을 통해 의미를 구성하는 방식이 영화 고유의 언어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발성영화가 등장했다고 해서 영화가 갑자기 예술로 도약한 것이 아니라, 이미 무성영화 단계에서도 영화는 충분히 완성된 표현 수단이었고, 이후에는 몽타주에서 서술로, 다시 말해 관객에게 의미를 강요하는 방식에서 현실을 열어 두는 방식으로 성숙해 갔다고 본다. 이랑은 오즈 웰스와 같은 감독들의 롱테이크와 디포커스 기법을 예로 들며, 이러한 연출은 관객의 인식 방식에 더 가까운 영화적 서술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한다. 동시에 그는 발성영화의 기여를 전면 부정하지는 않으며, 소리가 특정한 몽타주, 특히 속도감이나 긴장감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인정한다. 다만 그것은 영화의 본질을 바꾼 혁명이라기보다 기존 언어를 확장한 하나의 도구에 가깝다고 덧붙인다. 또한 이랑은 영화가 소설에 비견될 수 있는 이유를 대사 때문이라고 보는 관점에 동의하지 않으며, 대사가 거의 없는 소설도 소설이듯 영화 역시 말 없이도 충분히 서사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순수영화나 오리지널리티에 집착하는 태도를 경계하며, 영화는 본래 대중성과 오락성을 기반으로 성장한 매체이기에 각색과 차용은 필연적이었다고 말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에 대해서도 그는 비판보다는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누군가는 이해하기 어려운 형식을 먼저 밀어붙여야 이후에 그것이 대중적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그렇게 영화 전체의 표현 수준이 한 단계 올라간다고 보기 때문이다.


재혁은 이랑의 큰 틀에는 동의하면서도, 발성영화가 다뤄지는 방식에는 계속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영화가 소설과 같은 서사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언어, 즉 대사와 텍스트의 역할이 결코 작지 않은데, 책에서 발성이 지나치게 짧게 언급되는 점이 논리적으로 매끄럽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재혁이 발성을 영화의 본질로 보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는 영화의 진짜 성숙을 기술의 발명보다 그것을 다루는 인간의 태도와 정확함에서 찾는다. 몽타주든 롱테이크든 중요한 것은 얼마나 새롭냐가 아니라, 그것이 현실과 인간 경험을 얼마나 정확하게 담아내느냐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리얼리즘을 단순한 형식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로 바라보며, 인간이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과 닮아 있는 영화가 결국 더 설득력을 가진다고 말한다. 각색 영화 논쟁에서도 재혁은 원작 훼손이라는 개념 자체가 과장되었다고 본다. 어떤 영화가 원작보다 못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원작의 가치를 침해한다고 보기는 어렵고, 각색은 어디까지나 또 하나의 해석일 뿐이라고 말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에 대해서도 그는 단호한 찬반을 들기보다는, 그것이 무엇을 목표로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형식적 새로움만을 과시하는 작품은 공허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영화가 대중을 설득해야 할 의무를 지는 것도 아니며, 문제는 그런 작품을 우월한 것으로 소비하거나 강요하는 태도라고 선을 긋는다.


태웅은 이 논의에서 가장 관객 경험에 가까운 위치에서 말한다. 그는 발성영화가 단순히 기술적 진보가 아니라, 특정 순간에는 영화의 메시지를 결정적으로 완성시키는 힘을 가진다고 말하며, 그 예로 「위대한 독재자」의 마지막 연설을 든다. 대부분을 무성영화처럼 끌고 가다가 마지막에 소리를 통해 정치적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터뜨리는 그 장면은, 발성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태웅은 발성이 영화의 본질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지만, 어떤 작품과 어떤 맥락에서는 대체 불가능한 무기가 된다고 본다. 몽타주와 롱테이크의 차이에 대해서도 그는 이론보다 체감의 문제로 접근하며, 몽타주는 의도를 빠르게 전달하지만 현실과는 다르게 느껴질 수 있고, 롱테이크와 디포커스는 인간의 시선과 비슷해서 더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진다고 설명한다. 순수 영화 논쟁에서는 태웅 역시 완전히 새로운 창작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대부분의 창작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기존의 이야기와 형식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다만 그는 예술이 지나치게 난해해질 경우 관객과의 접점이 사라지는 것을 경계하며, 영화가 살아 있는 매체이기 위해서는 관객을 끌어당길 최소한의 오락성과 친절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놀란이나 카메론처럼 대중성을 발판으로 관객을 한 단계 더 끌고 가는 감독들을 높게 평가하며, 실험적 영화 역시 결국 누군가에 의해 번역되고 전달될 때 비로소 문화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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