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감독우민호출연현빈, 박정민, 조우진, 전여빈, 이동욱, 박훈, 유재명, 릴리 프랭키, 김태훈, 이태형개봉 2024.12.24.
24년 크리스마스이브에 개봉한 영화 <하얼빈>을 그때 보지 못했다. 2022년에 개봉한 뮤지컬 영화 <영웅>도 보긴 보았지만 텔레비전으로 일부만 보았기에 영화관에서 새로운 버전으로 보는 안중근 영화에 대해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정성화의 안중근 연기와 분장은 정말 실물과 거의 동일하다고 여겨질 만했다. 하지만 배우 현빈이 연기하는 안중근 의사가 과연 어울릴까 의아하면서도 꽤 신선할 것 같았다. 그동안 현빈이 보여준 다정다감하며 신사적인 이미지와 꽤 다르게 느껴져서다. <역린>( The Fatal Encounter 2014년)에서 정조를 연기한 현빈처럼 멋있고 귀티 나는 모습이 연기력을 다소 방해하지는 않을까 우려된 것도 사실이다.
초반에는 다소 지루했다. 잔인한 전투 장면도 있었지만 첨예하게 대립하는 독립운동가 사이에 대립과 비난이 가뜩이나 어두운 분위기를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 사이를 채우는 듯 스산하게 얼어붙은 두만강 위에서 비참하게 누워있는 안중근의 모습이 불현듯 영화의 분위기를 압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어둡고 심각한 표정의 배우들, 청문회를 하며 날 선 비판과 비난이 뒤섞인 듯한 장면이 꽤 오래 이어져서인지 나도 모르게 졸았다. 영화관에서 조는 일은 내게 거의 드문 일이라라서 나 자신에 대해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속으로 '아, 잠들면 안 되는데. 이건 영화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를 되뇌며 깨어나려고 한동안 분투했다. 다른 영화도 아니고 우리나라에 없어서는 안 될 영웅, 애국자를 그린 영화지 않은가.
영화를 보는 내내 감독이 안중근 의사의 외면이 아닌 내면을 다루려고 많이 애를 쓴 흔적이 보였다. 동지들이 허무하게 죽어간 순간, 홀로 비틀거리며 얼음 위를 걷는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고 결심하게 된 그의 심정이 그려졌다. 자신이 살아있는 이유.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먼저 희생한 수많은 동지의 몫을 짊어지고 가야 할 운명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간신히 졸음을 이겨내고 중반부터 영화에 집중할 수 있다면 이후 펼쳐진 몇몇 장면에서 강한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안중근을 다룬 이전의 영화와 다른 부분 가운데 하나로 이 영화는 안중근 의사에게만 초점을 두지 않는다. 가령 일본군 '모리 다쓰오'와 모진 고문으로 일본군의 밀정이 된 동지'김상현'의 모의 장면이 있다. 잔뜩 얼어붙은 김상현에게 정보를 캐던 모리는 느닷없이 자신이 먹던 스테이크 조각을 던져주며 말한다.
"먹어라!"
실컷 먹고 나서 경멸해 마지않는 개에게 먹이를 던지고 마치 선심을 베푸는 듯한 잔인한 일본군. 하지만 모리의 모습보다 그것을 손으로 덥석 집어먹으며 억지로 삼키는 김상현의 태도가 더욱 충격적이었다. 한 인간이, 한 나라가 다른 인간, 다른 나라를 집어삼키고 그 자체가 인류의 진보를 대변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강하고 위대한 나라이고 조선은 약하고 미개한 나라이니 '우리가 던져주는 부스러기나 먹고살아라, 그것만도 고마워해라'라는 극단적 우월주의가 느껴졌다. 약육강식의 정당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라 생각한다. 우리 민족이 겪은 고통의 역사가 일본의 병합이 아직 공식적으로 시행되기도 전에 시작했음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식민주의의 분위기에 편승해 서로 비난하면서도 묵인하는 강자들만의 오만을 보여주는 장면도 있었다. 기차 안에서 러시아 재무상과 만난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은 원래 중국 땅인데 러시아가 점유하고 있다'는 말로 먼저 자극하자 러시아 재무상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만행을 비꼬았다. 이에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대응하며 소름 끼치는 미소를 보낸다. 식민지 강대국의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역사에서 벌어진 인간의 잔인함을 접할 때면 분노와 울분을 잠재우기 힘들어진다.
"조선을 누가 차지할 것 같은가?"
러시아 못지않은 일본의 국력과 우수함을 알리며 강자끼리만 누릴 수 있는 세계의 한 축을 차지하리라는 선포이기도 했다. 영화는 이처럼 상징과 비유의 기법으로 역사를 돌아보게 하는 임팩트와 함께 안중근의 다른 면모를 부각한다. 독립운동의 최전방에서 물불 안 가리는 안중근의 영웅적인 면모보다는 인간으로서의 나약함과 갈등, 모순 등을 녹여내어 보다 인간적인 모습이 좀 더 비중 있게 그려진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동지에 대한 믿음, 배신에 대한 용서, 복수가 아닌 관용과 같은 인류애를 실천하는 모습은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서사와 서정을 넘나들며 생각의 여지를 주는 점에서는 효과적일지 모르나 아름다운 사막 풍경이나 얼어버린 강 위의 장면이 그저 멋있지만은 않았다. 어떤 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런 장면 위에 바로 동료들의 모습은 연결이 조금 어색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사막이나 황량한 벌판을 이동하는 장면이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음에도 촬영된 것은 감독이 보여주고 싶은 의도의 한 장치였을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는데 그들은, 우리의 선조는 누리지 못하고 고통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는 역사적 현실.
초중반에 나온 이창섭(이동욱)의 태도 변화도 어느 정도는 뜬금없어 보일 수도 있다. 안중근의 우유부단함이나 동지들의 희생을 빌미로 비난 일색이던 그의 태도가 일본군 앞에서는 '안중근은 너보다 훨씬 고결한 사람'이라고 외친다. 태도는 변할 수 있다. 그 자체에 문제는 없으나 태도가 완전히 바뀌게 된 계기나 이유에 대한 개연성이 분명히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도 주인공과 내내 갈등하고 대립하던 인물이었기에 교량 역할을 하는 뭔가를 바라서인지도 모른다. 필자의 인지 부족일지도 모른다. 아마 역사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형식에서 벗어나 다른 이면, 내부의 모습이나 상징에 중시해 표현하고자 한 감독의 의도라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전후로 그의 소신과 동양 평화론의 메시지가 다루어졌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1909년 10월 26일의 역사적 날을 다루면서 그의 독립의지와 변론이 크게 다루어지지 않은 것은 또 다른 아쉬움으로 남는다. 아무리 한국인 대부분이 안중근의 생애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지만 시간적 제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영화의 특성으로 감독이 그려낸 <하얼빈>의 매력은 적지 않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안 사실이지만 '김상현'과 '공부인'은 허구의 인물이었다. 단 이들의 모델이 된 인물이 있었는데, 각각 '엄인섭'과 '오항선'을 구현하였다고 한다. 영화를 볼 때는 이들의 행위가 과연 실제로 있었던 일일까 의심이 들 만큼 내면적이면서 남다른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들을 대변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완전한 허구가 아님을 알고 처음에는 놀랐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납득이 되기도 했다. 엄인섭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면서 통역사였고 안중근과 의형제를 맺기도 했지만 일본군의 밀정이 되어 수많은 피해를 야기하고도 한 인물이었다. 오항선의 경우 여성 독립운동가로 일본군에 남편과 친동생을 잃고도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후에 안중근의 조카와 결혼했으며 광복을 목격하였고 1990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받고 2006년 사망하였다.
대한 제국의 아들, 안중근의 변론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어설프기도 하고 따뜻한 이웃 같기도 해서 완벽하지 않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인간적이고 순박해 보였다. 무릇 사나이는 가정을 이루어야 할 도리를 한 것이라며 동지에게 결혼을 권하기도 하고 전쟁 포로를 함부로 처단할 수 없다며 관용을 베푸는 모습처럼. 그와 반대로 거사의 날이 다가오면서 '늙은 늑대를 처단하겠다는'선언을 지키려 외로운 싸움을 묵묵히 준비하는 안중근의 모습도 있었다. '코레아 우라(대한제국 만세'라는 러시아어를 외치는 그의 외침이 멈추지 않는 메아리가 되어 가슴에 남았다.
'쓸쓸함과 연약함, 강함을 공존한 안중근을 그리고 싶었다'(스포츠 한국, 12,22일 자 기사)는 우민호 감독의 말처럼 모순과 갈등, 혼란이 뒤섞인 인물과 장면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인생의 본질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선택을 했더라도 '나라면 과연 그럴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는 이 영화는 우리가 기억하고 질문하며 누군가의 희생에 감사하게 하는 작품이다. 국적을 불문하고 인간의 악한 본성과 고결한 선, 믿음, 의인의 존재로 우리 또한 존재할 수 있음을, 아무리 폭력의 역사가 반복되더라도 우리는 배움을 반복해야 함을 보여주는 영화, <하얼빈>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