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초 안드레아와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러 갔었다. 다음 날 뉴스를 보니 5일 만에 100만이 넘은(지금 940만으로 거의 천만을 앞두고 있다) 영화라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책, 영화, 드라마와 같은 예술 장르에서 때로는 초반의 흥행이 또 다른 흥행을 부르기도 하지만 작품성과 대중성을 충족해 호응을 얻어내기도 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역사적 사건과 감독의 상상이 만나 결국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내었다.
그동안 세조의 왕위 찬탈을 둘러싸고 종종 운운하는 사람은 주로 수양대군(세조)과 한명회(수양대군을 도운 실권자)였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 내내 악의 수장에 해당하는 인물 수양대군의 모습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다른 관람객의 평대로 <관상 >(2013년)에서 활약했던 이정재의 카리스마를 뛰어넘을 배우가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이번 영화가 주목하는 이야기에 방해가 된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일종의 사족처럼 너무 많은 뱃사공이 관객의 시건을 분산시키는 것을 감독이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 해명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결과적으로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제목도 <단종>이나 <계유정난>과 같은 역사적 사실에 치중한 게 아니라 사실을 바탕으로 상상이 더해져 참신한 예술작품으로 표현되었다. <왕과 사는 남자>라는 제목과 포스터에서 영화를 대하기 전, 관객은 어디에 초점을 두고 봐야 할지를 예상할 수 있다. 단종은 12살에 왕에 올랐지만 친 삼촌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17살의 어린 나이에 삼촌 때문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비운의 왕이었다. 자신을 지켜줄 어머니도 할머니도 없었고 크게 의지하고 있던 사육신, 생육신 등의 신하들의 고통을 보며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늠할 수가 없다. 그저 짐작할 뿐. 이 영화를 통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혈육에게 협박당하며 인생을 좌지우지하도록 맡기는 그 심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축은 왕과 사는 남자, 엄흥도이라는 인물이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포스터와 출연진을 보고 그저 진지한 영화의 감초 역할을 위해 투입되었다고만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 이상의 의미가 느껴져서 여러 번 놀랐다. 우선 실제로 존재한 인물로 당시 패가망신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 단종의 시신을 거둔 인물이었음에 놀랐다. 또 하나는 영화를 보고 나서야 제목의 무게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억울하게 폐위된 왕(이홍위)과 사는 남자, 즉 '왕과 사는'이라는 관형어는 그저 왕이 아닌 남자에 방점을 찍어 도울뿐이었다. 그는 속세에서 적당히 세속화되고 적당히 욕심을 부리며 사는 평범한 하급 관리였다. 후대의 한 관객으로서 엄흥도가 어린 왕을 만나 어떤 인연으로 엮이었는지, 어떤 대화가 오갔을지, 어떤 심정으로 용기를 내었는지 지켜보았다. 물론 두 사람의 이런 관계와 대사는 감독의 상상이 들어갔지만 황당한 판타지의 허구가 아닌 정말 그랬을 듯한 역사적 허구이자 두 사람에게 보내는 헌사와 위로처럼 들렸다.
주연과 조연을 굳이 따질 필요가 있을 정도로 전반적인 분위기와 장면, 대사의 어울림, 표현력도 좋았다. 엄흥도 역의 유해진은 단순히 베테랑이라는 타이틀을 넘어서서 정말 그 인물에 몰입하고 진심을 담은 눈빛이 압권이었다. 나약하고 무력한 왕의 모습부터 백성을 구하기 위해 추상같은 불호령을 내리는 박지훈(단종 역)의 열연, 소름이 끼치고 나도 모르게 혐오가 느껴질 정도로 시선을 사로잡는 유지태(한명회 역)의 냉정하고 날카로운 음성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연기가 좋았다고 느꼈던 또 다른 계기가 있다. 점점 많은 관객이 보고 있던 어느 날 기사를 보았다. 영화에 몰입한 일부 관객이 세조의 능 관리 홈페이지에 가서는 '어린 조카를 죽이고 편히 잠이 오냐'는 항의 댓글이 있었다고 한다. 반대로 단종의 능을 관리하는 곳의 사이트에는 '단종 오빠, 이제 편히 쉬세요'와 같은 말이 달렸다고 했다. 먼 훗날 후대 사람으로서 느낀 울분이 이해가 가서 웃어넘겼지만 그 당시에 살았다면 누가 들을까 엄두도 못 낼을 것 같아 씁쓸한 느낌도 들었다. 시대에 따라 민심을 표현하는 행태는 변하지만 권력에 대한 인간의 탐욕은 결코 변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김민이 연기한 엄흥도 아들 태산, 단종의 귀양길까지 내내 함께 했던 궁녀, 전미도의 모습도 있었다. 그들이 후에 입신양명한다거나 하는 뻔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지 않은 점도 좋았다. 비극적인 사실 그대로 서술하되 왕과 남자, 두 사람이 겪은 갈등, 우정, 복잡하게 얽힌 배신의 감정과 서로를 향한 믿음의 장면에서 눈물이 나왔다. 그들의 영혼이 여전히 영월의 청령포와 그 앞에서 흐르는 강물에서 머무는 듯하다.
출처:네이버
왕과 사는 남자
드라마 2026 장항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