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굳이 그림을(3월 북클럽 후기:이주헌)

by 애니마리아


먹고살기도 바쁜 세상이다. 습득해야 할 지식과 기술만도 버거운 시대. 해야 할 일, 알아야 할 일이나 정보가 넘쳐난다. 때로는 쓰나미처럼, 때로는 천재지변처럼 다가오는 변화, 변화, 변화. 이런 시기에 일반인이 굳이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그림, 조각 등을 굳이 찾아서 감상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관심분야도 아니라면 더욱 이해가 안 갈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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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의 제목은 <희망 Hope>이다. 영국의 화가 조지 프레드릭 와츠의 작품으로 우화적 상징주의 통해 희망, 사랑, 삶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한 작가로 명성을 얻었다. 언뜻 이 그림은 뭔가 제목과 맞지 않아 보였다. 미술관에서 보았다 해도 '그냥 눈을 가린 여인의 그림이네, 슬퍼 보이는군' 하며 지나갔을 법한 그림이다. 조금만 시간을 더 들여 살펴보자. 어떤 게 눈에 들어오나. 어떤 느낌이 나고 생각이 드는가.



눈은 안 보이는데 다친 것인가? 어쨌든 눈이 보이지 않음에는 확실하다. 시각 장애뿐만 아니라 옷도 허름하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바위에 앉아있나 보니 그건 아닌 듯 보인다. 둥근 구슬 모양의 암석 같기도 하다. 여신인가, 님프인가. 들고 있는 물건이 정의의 여신이 들고 있는 저울인가 했지만 그것도 아니다. 뭔가 부서지고 오래된 옛날 물건 같다. 전체적으로 녹슨 금속의 갈색과 황폐한 분위기가 우울하다. 그야말로 절망의 순간에 가깝다. 도대체 뭐가 희망이라는 건가.



미술 평론가이자 도슨트 이주헌 작가는 말한다. 희망은 충만하고 완전하게 아름다운 상태가 아니라 부족하고 흠 있는 절망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소녀는 둥근 지구에 앉아 있다. 푸르고 아름다운 모습의 지구는 아니지만 군데군데 희미한 푸른색이 아직 남아있다. 소녀의 모습은 애잔하다. 눈은 멀었고 낡은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추워 보인다. 그녀가 들고 있는 건 사실 리라이다. 서양의 대표적인 현악기이지만 줄이 다 끊어지고 단 하나만 남았다. 현재는 절망적일지 모르나 아주 어두운 건 아니다. 단 하나의 현이 남아 있고 소녀는 정성껏 손의 감각을 동원해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희망의 소리를 만들고 있다. 단 하나의 줄에 달린 희망의 음악을.



강연 시작에 우리에게 던지신 작가님의 질문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우리는 왜 예술을 감상할까'. 그건 바로 느낌표를 얻기 위해서라고 한다. 느낌표는 삶의 의미이며 창의적 순간을 위한 영감이다. 아는 만큼만 보이는 지식의 확장이 아니라 알고 나면 또 다른 창조와 아이디어의 순간이 영원함이 되어 가치가 피어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는 게 많은 어른은 상대적으로 아이보다, 청소년 보다 오히려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느낌이 있는 찰나를 잘 이용하면 영원이 될 수 있다. 예술 감상은 나를 삶의 주체로 세워주는 가치 있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좋은 건 알겠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말이 어렵다고 느꼈다. 슬로우 아트라는 말을 곱씹어 보면 이해에 도움이 된다. 슬로우 조깅도 아니고 슬로우 아트(slow art)는 뭘까. 어느 미술관에서 실험을 했는데 명화 6점을 돌아보는 시간이 평균 27초였다고 한다. 유명하고 높은 가치의 그림도 한 점 감상하는데 단 몇 초만 걸리니 그 의미와 아름다움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까. 이 실험을 바탕으로 미국의 몇몇 미술관은 슬로우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 소그룹 관람객을 선정해 천천히 그림을 감상하게 한다고 한다. 작가, 작품, 비평에 대한 어떤 사전 지식도 주지 않고 오로지 한 작품에 10분 이상 소비하며 작품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든다. 감상이 다 끝나면 함께 모여 서로의 감상을 나누고 토론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예술을 감상한다는 것은 마치 한 권의 책을 정독하기, 깊게 읽으며 명상하는 과정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찬북클럽에 오는 회원들은 상당수가 지도자 역할을 하거나 CEO가 많다. 이런 분들이 경제, 경영, AI와 같은 첨단 정보 수업만 들어도 모자랄 것 같은데 굳이 미술 이야기가 필요할까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다. 이런 우려를 의식하셨는지 먼저 정주영 회장의 이야기를 꺼내셨다. 1985년 서산 간석지를 만드는 일이었다. 200~300미터 내외의 조수 입구에 드나드는 파도가 워낙 거세고 많아서 공사가 불가능했다고 한다. 모두 이 사업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했다. 정주영 회장은 이에 자신의 회사가 확보해 둔 유조선 선박을 떠올렸고 그것으로 길목을 막아 물이 들어오는 것을 최대한 막을 수 있었다. 그렇게 지금의 서산 간척지가 설계될 수 있었고 문제는 해결되었다. 가장 똑똑한 공학 박사와 전문가들이 주장한 불가능을 가능으로 전환한 힘은 바로 창의적 발상이며 미술은 창의성을 발휘하게 만들어준다. 영감을 준다.



이런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기존의 지식 전문가가 아닌 예술인과 같은 열린 마음과 창의적 발상에서 나온 아이디어와 유사하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는 천재에게 나오거나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다. 창의적인 생각을 평소에 차곡차곡 심어두거나 잘 보관했다가 필요한 때에 끄집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바탕은 단연 예술적 감각과 내공에서 비롯됐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랑, 이별, 희망을 이야기하며 보여준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1880 힝클리), 아탈란테와 히포메네스 이야기에서 비롯한 <아탈란테>(1908)의 여러 그림 등 책에 수록되지 않은 다양한 작품을 함께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림과 관련된 신화도 흥미로웠지만 그림이 주는 진짜 주제, '소중한 것(돈이나 나의 자존심, 명예, 오만 등)을 포기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참다운 격언처럼 들렸다.



단 몇 점의 예술 작품을 많이 보고 많이 들으며 감상함으로써 삶의 느낌표를 찍는 사람은 예술가만의 특권이나 취향이 아니다. 예술은 지식이 불변의 진리라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도 한다. 아인슈타인은 물리 문제에 대해 논리, 수학뿐만 아니라 시각적 상상력을 동원하기도 했다고 한다. 리얼리티는 정확한 사진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현실과 진실을 반영한 느낌에 있기 때문이다. 가식적인 웃음으로 인상 좋은 처칠의 초상 사진보다 시가를 뺏기고 불만 섞인 처질의 모습이 더욱 진실하며 설득력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학 지식도 절대 불변하지 않다. 뉴턴은 시간은 항상 똑같이 흐르고 공간은 고정되어 있다고 했으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이를 수정하게 만들었다. 이후 나온 양자 역학은 상대성 이론과 전혀 다른 영역을 다루며 통합되지 않았다고 한다. 절대적이지 않은 지식은 인간의 생각과 상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계속 확장해 나갈 뿐이다. 그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 미술, 예술의 영영이지 않을까 싶다. 예술을 창조하는 자유영혼은 상식에서 종종 벗어나지만 우리의 편견과 제한을 풀어주기도 한다.



앞에서 언급한 <희망>은 절망 속에서 더욱 빛나는 가치로서 작용한다. 아마 미국의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이 작품을 자주 인용한 것도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려운 시기,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야 하는 우리, 국가, 세계는 절망 속에서도 단 한 줄기의 희망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 시각적으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창조성과 예술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뿐만 아니라 무한한 우주의 진리를, 희망을 찾아낼 수 있다.



이주헌 작가님과 북클럽 프로그램 덕분에 이런 넓은 시각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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