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더데빌>을 통해 발견한 생의 희망
나는 흔히말하는 ‘결정장애’ 중증환자이다. 아니 사실은 거의 말기일지도 모른다.
호불호가 강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하나를 선택하는 작업은 너무나도 고되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데 어떻게 하나만 고르란 말인가! 아니 사실은 하나를 선택했을 때, 반대급부적으로 다른 하나를 잃어야한다는 손해가 너무 싫어서 선택이 힘들다고 봐야할 지도 모르겠다. 손해보는 것이 끔찍히도 싫다. 더 좋은 선택을 만드는 것은 쉬워도 어떤 것이 더 큰 손해를 불러오는 선택이될 지 판단하기가 정말 어렵다.
이런 나에게 뮤지컬<더데빌>은 캐치프라이즈부터가 굉장히 유혹적인 작품이었다. 포스터에 대문짝만하게 적힌 “당신은 거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보자마자 든 생각은 “악의 유혹이라면 당연히 거부해야지!”였다. 응당 해야할 일인 것처럼 말이다. 악에게 유혹당하는 건 명백한 손해니까. 내 앞에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있다면 당연히 선을 선택해야지! 내 대답이 옳다는 걸, 정확히는 합리적이라는 걸 증명하고 악을 선택하고 파멸해가는 주인공을 마음껏 비웃어주고 싶어서 바로 뮤지컬을 예매했다.
보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주인공인 존 파우스트가 아니라 그의 약혼녀인 그레첸이 참 불쌍하다는 거였다. 남자 한번 잘못 만나서 저렇게 고통받고 미쳐가는구나… 혼자였다면 저렇게 악의 괴롭힘을 받을 일이 없었을텐데. 왜냐면 그녀는 어둠의 손을 잡고 X-Black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존 옆에서 끊임없이 구원을 기도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존이 너무도 바보같았다. 그런데 마지막 씬에서 X-Black과 X-White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다 결국 그 어느 것의 손도 잡지 않고 스스로 속죄를 선택한 존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는 순간 그 생각이 완전히 깨져버렸다.
인간은 참 어리석다. 빛이 어둠을 이긴다는 걸, 어둠을 등지고 빛을 향해 나아가야한다는 명제를 모두가 다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빛을 등지고 깊고 깊은 어둠을 유혹에 이끌려 끝없이 내려간다. 반짝이는 악의 유혹은 항상 달콤하기에 때로는 어둠을 빛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극에서는 그 어둠이 돈, 즉 부로 대변된다.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흔하다 못해 넘쳐나는 종류의 달콤함이다. 블랙먼데이로 모든 걸 잃은 존은 X-Black의 손을 잡는다. 재기하기 위해, 자신의 약혼녀인 그레첸을 보호하기 위해. 이는 분명 빛을 향해 나아가기 위함이었다. 그치만 이 하얀 손길은 곧 어둠에 잠식된다. 자본권력 앞에 무너졌던 존은 도리어 그 위에 군림하며 점점 악에게 물들고 타락하게 된다. 그레첸을 보호하려던 목적의 계약은 오히려 그레첸을 망가뜨린다. 이 얼마나 보통 인간의 모습인가! 나도 그렇다. 나는 누구보다 돈에, 부에 취약하다는 것을 안다. 내가 항상 선택의 순간에서 극심히 갈등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내 경제적 손실이 더 큰 선택을 피하고싶기 때문이다. 돈이 뭐길래, 부자가 되어 한 번뿐인 생 잘 살아보겠다는 욕심이 뭐길래 이렇게 큰 집착과 눈 먼 욕심에 인간을 무너뜨리는 걸까.
그레첸은 끊임없이 악에 저항하며 빛을 좇았으나 결국 악에 굴복하고 미쳐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 순간 존은 역설적이게도 악으로서 완전해지는 게 아니라 본질적인 순수영혼을 잃고 파멸하게 된다. 지난날 선과 악 사이 교차점에 다시 서게 된 존 파우스트는 허탈한 표정을 짓는다. 그곳에서 존은 빛이 언제나 자신의 곁에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손내밀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다만 스스로 그 손을 잡기 위해 한발자국 나아가지 않았을 뿐, 그 손을 외면하고 악마의 유혹을 선이라 착각한 무지만이 있었을 뿐. 존은 죽음으로 자신의 우매함을 속죄한다.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빛의 신은 어둠 속을 헤매는 나를 직접 구원해주지 않고 그저 한발 뒤에서 기다리기만 했을까? 어쨋든 존은 결국 자신을 진정으로 구원해줄 신이 있음을 깨달았는데 왜 그 손을 잡지 않고 죽음을 택했을까? 아무리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실수를 반복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자본권력이란 그 악함을 알면서도 쉽게 저항할 수 없는 대표적인 힘 중 하나이다. 존은 무의식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빛은 자신을 언제나 비출 것이지만 빛에 가닿기 위해 행동하는 주체는 빛이 아니라 인간 그 자신이어야만한다는 것을.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악에게 끊임없이 굴복하게 될테고, 때로는 그 어둠을 또다시 빛으로 착각할 것이라는 것을. 고난과 노력으로 점철되는 방황의 시간은 죽음이라는 종착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어둠으로부터 해방되는 방법은 죽는 것 뿐인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극이 보여주는 죽음이라는 결말은 그저 여운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그저, 수많은 유혹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잘못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라면 그렇다. 언제나 옳을 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은 언제나 내 곁에서 손을 내밀어 기다리고 있으니 그 사실만을 잊지 않으면 주저 앉았어도 다시 일어나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나는 이 극을 통해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보았다. 내게는 언제나 절망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부정적 생각에서 벗어나게 됐다. 당장 내 눈앞에 빛이 보이지 않아도, 날 구원해 줄 신이 없는 것 같아도 분명 빛은 날 기다리고 있다. 내가 한 발자국 나온다면 언제든 내민 손을 잡을 수 있도록 그 자리에. 견고하고도 든든하게.
나약한 존재일 뿐인 나 혼자만 우두커니 서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내 곁에 분명히 있을 빛을 보자. 가끔씩 빛은 너무 눈이 부신 나머지 오히려 보이지 않는다.
부신 눈을 감았기 때문에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다시 눈을 뜨려고 노력해보자.
그게 때로는 힘에 겹고 고통스럽더라도, 그래도 노력해보자. 그러면 반드시 다시 빛을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