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 에세이
이 책을 만나게 된 곳은 코엑스에서 열린 국제도서전이었다. 제대로 구경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린 빌딩 안에서 저 멀리 낯익은 작가의 이름이 걸린 부스가 보였다.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이라는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정혜윤 작가였다. 상상했던 도서전의 모습과는 달리 다소 상업적인 분위기에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 더욱 반가운 마음이 들어 들뜬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열된 책들을 천천히 훑어보다 도서전에 함께 온 친구와 책을 선물 교환하기로 했다. 나는 친구에게 <아무튼, 메모>를 선물했고 친구는 내게 <삶의 발명>을 선물했다. 어떤 이야기의 책인지도 모른 채, 아무 기대 없이, 그냥 좋아하는 작가의 책 정도로 시작한 이 책은 다 읽는데 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잘 읽히지 않아서도 아니었고 재미없어서도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정말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것 같은 이야기들이 많아서였다. 그렇게 귀 기울여 읽은 책에서 나만의 희망을 보았다. 이 책을 읽게 되는 누군가도 그 만의 희망을 보았으면 좋겠다.
<삶의 발명>은 이야기 덩어리 그 자체다. 작가는 앎, 사랑, 목소리, 관계, 경이로움 그리고 이야기의 발명 순으로, 궁금해하지 않으면 몰랐을 그리고 들려주지 않으면 몰랐을 것들에 대해, 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무엇이든, 하나의 삶의 발명을 통해 여러 삶을, 나아가 본인의 삶을 발명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았다.
첫 비행을 배우는 어린 새들의 엉망진창 날갯짓을 사랑한다. 새들이 첫 비행을 하는 호수와 절벽, 늪지와 습지 또한 사랑한다. 작은 새들의 오종종종 달리기를 사랑한다.
많은 이야기 덩어리 중에 유독 마음에 남은 이야기는 목소리의 발명 편이었다. 새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조류 공포증을 가지고 있다. 조류 공포증이 생긴 건 아마도 어릴 적 공원에서 황당스럽게 날아온 갈매기의 뒷발에 정수리를 때려 맞은 후부터였을 것이다.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나는 새를 무지 무서워하고 거리에 우글거리는 비둘기들과 마주치는 순간 몸이 얼어버려 옮싹달싹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운전 중 갑자기 날아오르는 새떼를 마주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정말 위험한 일이지만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버리게 되는 수준이다. 그런데도 나는 '새'에 대한 이야기가 제일 좋았다. 어쩌면 그것은 단지 비이성적인 혐오와 두려움을 자극하는 새의 어떤 생김새일 뿐, 새의 존재를 아니 새들의 삶까지 부정하거나 싫어한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자세히 알지 못해서 사랑하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최근 내가 매미를 측은스럽게 생각하게 된 것도 비슷한 경우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미는 내게 아주 크고 징그러운 곤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우연히 매미의 운명을 듣게 된 이후로 나는 매미를 응원하게 됐다. 매미는 수년간, 길게는 십 년 넘게도 땅속에서 갇혀 지내다가 종족번식을 위해 세상으로 기어 나와 고작 몇 주를 울다가 죽는다고 한다. 무더운 여름 하늘 아래로 울려 퍼지는 맴맴맴맴 소리가 이제는 측은스럽다. 어떤 삶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웅크리고 있던 미움이 하나 접히고 다른 보드라운 것이 꿈틀 된다.
익숙한 곳에 남을 것인가 친구를 따라 먼 곳으로 갈 것인 가?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쪽은 포기해야만 한다. 과연 어느 쪽이 옳은 길일까?
사고로 날개와 다리를 다쳐 보호를 받고 있던 흑두루미 두리가 야생으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참 좋았다. 처음으로 순천만에 놓인 두리는 낯선 두루미 무리와 만나게 되고 겨울이 지나 봄이 오자 결국 순천만에 남을지 아니면 두루미 친구들을 따라 여행을 떠날지 선택에 기로에 놓인다. 마지막날 두리는 크게 한 번 울고는 날개를 크게 펄럭이며 하늘로 날아오른다. 두리의 결심을 상상하면 왠지 모르게 감정이 벅차오른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날아오르기를 결정한 두리가 남긴 마지막 울음소리는 두리의 선택이자 소망이었다는 작가의 말이 너무나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인생의 기로에서 선택을 해야만 할 때, 마지막까지도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야 하는, 선택하고 소망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우리의 삶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에 작가의 상상이 더해져 두리가 친구와 나누는 대화로 이어진다. 아마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인생이 끝났다는 생각이 얼마나 끔찍한지에 대해서,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에 대해서, 친구들로부터 받은 환대가 얼마나 힘이 되는지에 대해서, 자유가 좋다는 것을 알지만 그 자유엔 얼마나 큰 책임이 따르는지에 대해서. 앞날을 모르면서 뭔가를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 그러나 강은, 바다는, 밀밭은, 숲은 얼마나 반짝이는지에 대해서"
하늘은 그냥 하늘이 아니었다. 수많은 생명체가 자신의 길을 찾는 곳이었다*라고 말하는 정혜윤 작가의 글은 정말로 빈틈없이 읽는 이의 마음을 감탄으로 채워낸다.
모든 생명체는 모두 자기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언젠가 우리는 모두 이야기 속으로 사라진다.
작가의 말을 옮겨, 이걸 가지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번잡스러운 선물 '삶'*을 나는 앞으로 어떻게 나다운 방식으로 맛보며 살아가야 할까? 내 이야기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발명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앞으로 또 무엇을 사랑하게 될 것이며 그 무엇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며 살아가게 될까? 이런 질문들을 던지게 됐다. 그리고 또 하나, 모든 이야기에는 아픔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이야기 속에 치유도 있다. <삶의 발명>은 시공간을 넘어 회복하는 힘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작가는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서 알게 되는 것은 한 인간이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자 힘이다.
감탄할 때 현실이 달리 보였고,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란 게 분명 존재한다고 느껴졌고, 사는 것이 더 재미있어지고 더 좋아지고, 내가 뭘 해야 할지도 알 것 같았다. 감탄 속에 있을 때 나는 잘 살고 있다.
회복되려면 슬플 정도로 많은 노력을 해야겠지만 앞으로 또 슬픈 일을 겪게 되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기쁨을 위해 태어났다.
나는 무엇에 '대해서' 말하는 동시에 무엇을 '위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 가진 가장 좋고 아름다운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책을 읽으면 된다. 내게는 새 책에 대한 기대가 새 삶에 대한 기대, 곧 내 목소리와 합쳐질 새 목소리에 대한 기대나 같았다. 작가들은 나에게 새 '눈'과 새 '목소리'를 준다
두려움의 감옥 문을 열고 나와서 본 현실은 그렇게나 크고, 그렇게나 신비롭고, 그렇게나 놀랍도록 다정한 것이었다.
쓸쓸함 너머, 덧없음 너머, 세상은 빛나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자아를 실현하면서 삶을 살아내는 것을 삶의 발명이라고 부른다. 바닷가에서 돌고래를 기다리는 것이 나에게는 나다운 것이고 행복이고 자아실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