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역할의 전환, 그 이면의 심리학
학창 시절에는 학생이라는 배역을, 사회에 나와서는 직장인이라는 배역을, 그리고 결혼 후에는 부모라는 배역을 맡아 살아간다. 그러다가 ‘은퇴’라는 무대에 이르게 되면, 익숙했던 가면을 벗고 전혀 새로운 장면 앞에 서게 된다. 그때 많은 부부들이 낯선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평생 밖으로만 돌던 남편은 집 안 깊숙이 들어앉고, 늘 집을 지키던 아내는 오히려 세상 밖으로 향한다. 마치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자리를 맞바꾼 듯한 ‘성 역할 역전‘ 공연의 막이 올라간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취향이 바뀐 걸까? 아니면 오래 눌러두었던 본성이 이제야 슬며시 고개를 드는 걸까?
은퇴 후 남편은 회사에서처럼 바쁘게 움직이지 않는다. 하루 종일 TV 앞에 앉아 있거나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낸다.
예전의 활발함은 희미해지고, 말수도 적어진다. 반면 아내는 달라진다.
늘 집을 지키며 가족을 위해 헌신하던 아내는 이제 집 밖으로 뛰쳐나간다.
명분도 다양하다. 동호회 모임, 평생교육원 그리고 자원봉사에 나선다. 새로운 얼굴들과의 만남에 눈동자는 빛나고, 전에 없던 활력이 생긴다.
이러한 변화는 종종 남편의 불안을 가증시킨다.
“당신, 왜 이렇게 변했어?”
때로는 서로를 향한 이런 의문이 작은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변한 게 아니라, 되돌아간 것이다
많은 사람은 “나이가 들면 성격이 바뀐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심리학은 조금 다른 관점으로 본다. 성격이 변한 게 아니라, 오랫동안 연기하듯 쓰고 있던 가면이 벗겨진 것뿐이라는 것이다.
남편은 사회 속에서 늘 외향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야 했다. 내향적인 기질을 가졌더라도 가장, 팀장, 상사의 사회적 역할 가면을 쓰고 살아야 했다.
은퇴 후 그 무대가 사라지자, 억눌러왔던 내면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것은 무기력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는 ‘내면 성찰’의 과정일 수 있다.
아내의 역할 변화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가정이라는 무대에 묶여 있던 그녀들은 자녀가 독립하고 집안일의 무게가 덜어지면서, 비로소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외향성과 사회적 욕구를 드러낼 수 있게 된다.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미뤄왔던 꿈을 꺼내보고, 잊고 지냈던 자신을 다시 만나는 시간을 비로소 맞이하게 된 것이다.
부부가 이런 변화를 겪을 때, 처음에는 낯설고 불편하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위기가 아니라 기회다. 오랜 세월 사회적 역할이라는 무거운 옷을 입고 살던 두 사람이, 이제는 서로 앞에서 그 옷을 벗어놓고 본래의 모습으로 마주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시간을 갈등이 아니라 성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부부는 단순히 함께 늙어가는 존재를 넘어, 서로의 새로운 가능성을 지켜보고 응원하는 진정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