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의 무게, 10달러

엄마의 DNA와 나의 선택

by 애니유칸


나는 종이책을 사랑한다.
물론 편리함으로만 본다면, 전자책이 으뜸이다. 인터넷에서 결제하고 파일을 다운로드하면 끝이다. 거기다 가격까지 착하다.
배송비, 픽업 그런 번거로움도 없다. 결제 즉시 바로 볼 수 있는 전자책의 즉시성에 비하면, 온라인으로 주문한 종이책이 한국에서 미국까지 열흘 넘게 걸려 도착하는 과정은 어쩐지 비합리적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평소 주문하려던 책이 전자책으로 나오지 않았을 때만 종이책을 주문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이미 전자책이 나와 있는데도 굳이 종이책으로 주문했다. 왠지 이번 책은 보관하고 싶었다. 물론 전자책도 이북 리더기 ‘내 서재‘에 차곡차곡 쌓이는 기쁨이 있지만, 종이책이 주는 묵직한 ‘소유’의 만족감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전자책은 내가 직접 열어봐야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지만, 종이책은 책장에 꽂혀 있는 것만으로도 그 존재감이 확실하다. 눈에 보이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그런 특별함이 있다.


결국,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내가 선택한 건 종이책이었다. 종이의 질감, 책에서 은근히 풍기는 냄새, 책장을 넘길 때의 사각거림까지…, 종이책은 오감으로 즐길 수 있다. 반면, 디지털 책은 너무 간결하고 직관적이라, 여운이 짧다.


합리적인 선택이 불러온 비합리적인 삶


한국에서 공수해 온 책이 매장에 도착했다는 이메일을 받은 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이제 남은 일은 단순했다. 매장에 가서 책을 받아오는 것뿐 …


마켓 가는 길에 잠깐 들르면 되지 하고 선택한 ‘매장 픽업’ 그런데 막상 책이 도착하고 나니, 그 ‘잠깐‘이 한참으로 느껴졌다.

평소 다니지 않는 길로 들어서는 게 왜 이렇게 귀찮은지…,

조금 돌아서 가는 길, 익숙하지 않은 풍경, 낯선 교차로… 그 모든 게 배송비 10불을 아껴서 얻는 만족감보다 훨씬 크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아 오늘은 책 픽업하러 가야 하는데… “ 책을 만나고 싶은 마음과 운전하기 싫은 마음이 팽팽히 맞서면서, 배송비 10달러를 아꼈다는 뿌듯함 대신 묵직한 불편함이 일주일 내내 나를 괴롭혔다.

왕복 1시간 거리, 기름값, 소요되는 시간까지 합치면 이미 10달러 이상의 대가를 치른 셈이었다. 명백히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이었다.


어릴 적 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늘 동네 재래시장보다 노량진 수산시장이 더 싸다며, 그 먼 노량진까지 가셨다. 어디 그뿐인가 겨우 생선 몇 마리 사가지고 오시면서 힘들다며 기꺼이 택시를 타셨다.


어린 마음에 아무리 셈을 해보아도 택시비가 생선값보다 더 나오는 그 비합리적인 행동과 엄마의 논리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바로 그 엄마의 모습과 똑같이 하고 있다.


나는 왜 이럴까…?

엄마의 유전자를 타고난 걸까, 아니면 어른이 되어보니 합리적 계산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걸까…?


어쩌면 엄마에게 노량진 수산 시장은 단순히 생선을 파는 곳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가족에게 가장 싱싱하고 좋은 것을 먹이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향하던 곳.


나에도 10불을 아끼는 일은 단순한 절약이 아니었다. 종이책에 대한 집착, 그리고 애정을 증명하는 의식 같은 것이랄까…?


오늘은 드디어 책을 픽업하러 가는 날.

낯선 도로를 달려 책을 손에 넣는 순간, 일주일 내내 나를 괴롭히던 불편한 감정들이 스르르 사라졌다.


책을 들고 돌아오는 길,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 속에서 문득 엄마의 노량진 수산시장이 떠올랐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엄마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걸.



{세대, 습관, 결핍, 불안}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