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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치 않는 사랑의 가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 불멸의 명작, 고전이 주는 아름다움을 말하다.

 첫사랑은 언제나 특별하다. 무엇에든 서툴지만 그래서 더 솔직하다.

 풋풋했던 감정들은 갖가지 빛깔로 마음속 어딘가에 깊숙이 남았다가 불현듯 떠오르기도 한다. 그 순간 직감한다. 이런 느낌은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며, 늘 반복되리란 사실을. 누구나 한 번쯤 느껴봤을 익숙한 감정,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은 바로 그런 첫사랑을 닮았다. 아마 누군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단 한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답할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다.      


 ‘오페라의 유령’과 처음 마주하게 된 건 고등학생 때였다. 새카만 바탕에 하얀 가면이 그려진 책 표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프랑스어판 국내 첫 완역본이었다. 호기심에 펼친 책은 풋풋했던 여고생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 후에도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오페라의 유령’을 마치 습관처럼 꽤 사 모았는데, 그새 하도 읽어 표지가 낡아버린 건 이 책이 유일하다. 제라드 버틀러와 에미 로섬이 주연한 2004년 개봉 영화도 몇 번이나 보았는지 모른다. 늘 보고 싶었던 뮤지컬을 영화로나마 먼저 보게 된 기쁨은 도무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도였다. 알고 있던 내용과 달랐지만, 그게 더 좋았다. 음악이 더해지니 더 큰 감동이 물밀 듯 찾아왔다. 덕분에 한겨울 추위를 잊을 만큼 행복했던 그 날 저녁도 작품의 추억과 더불어 여전히 기억 속에 각인돼있다.      


<오페라의 유령> 원작 소설, 가스통 르루 저, 더스토리


 1986년 영국 웨스트엔드 초연, 1988년 미국 브로드웨이 초연 이후 30년간 계속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한국 뮤지컬 시장을 본격적인 상업화 단계에 이르도록 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친 작품이기도 하다. 뮤지컬계 두 거장,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주옥같은 음악과 해롤드 프린스의 연출로 새롭게 태어나 토니상 최우수 뮤지컬 작품상, 로런스 올리비에 최우수 인기 작품상 등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만큼 수많은 수상 이력을 쌓아왔고, ‘브로드웨이 최장기 공연’ 타이틀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무려 ‘캣츠’를 넘어선 기록이었다. 그만큼 정말 오래도록 많은 사랑을 받아온 작품이 바로 ‘오페라의 유령’이다.  


 한국어로 번안된 국내 초연이 2001년이었는데, 아쉽게도 그 공연은 보지 못했다. 뉴욕 브로드웨이 공연, 그리고 2005년부터 2012년, 그리고 작년 2019년부터 올해 2020년에 이르기까지 3번에 걸친 내한공연은 모두 챙겨보았다. 특히 2019년 12월 부산 초연은 여러모로 역사적인 날이기도 했다. 지방 공연으로 월드투어의 첫출발을 알리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인 데다, 무려 7년 만에 들려온 내한공연 소식이어서 작품을 기다렸던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령의 샹들리에가 부산에서 빛난 것 또한 최초였다. 부산 공연 첫날, 한가득 설렘을 안고 드림씨어터를 찾았다. 규모는 조금 작은 듯했으나 그래서 더 어울렸다. 아름답고 황홀한 마법이 눈앞에 펼쳐졌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여러 가지 감정들로 충만해진 느낌. 나는 이 느낌을 참 좋아한다. 역시 ‘오페라의 유령’이었다.


 내한했던 역대 유령을 비교하며 보는 재미도 남달랐다. 브래드 리틀, 라민 카림루, 그리고 이번 조나단 록스머스까지 각 배우마다 유령을 표현하는 방식이 전반적으로 비슷한 듯하면서 또 각각 지닌 매력이 너무나 달라서 더 즐겁다. 거부할 수 없는 마성의 목소리로 강력하게 크리스틴을 사로잡다가도, 한순간에 상처 받은 영혼의 절규를 내지를 때면 어느새 두 손을 맞잡고 무대를 응시하게 된다. 특히 조나단 록스머스의 유령은 굉장히 감성적이고 섬세하다. 지금은 비록 중대한 위기상황으로 인해 조심스레 개막했던 서울 공연이 결국 중단되고 말았지만 급하지 않게 천천히, 언젠가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을 때 즈음 그의 공연을 다시 만나볼 기회가 오길 바란다.      


부산에서 구입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기념품. 또 하나의 작은 설렘.


 ‘오페라의 유령’ 작품 배경이 된 프랑스 국립 오페라 극장은 1875년에 개관된 팔레 가르니에(Palais Garnier)로 흔히 ‘오페라 가르니에’라고도 불리는 극장이다. 이 극장 지하에는 작은 배 하나가 뜰 만한 크기의 저수조가 있다고 전해진다. 일반인의 접근은 제한되어 있는 곳이다. 이는 마치 유령의 은신처를 연상시키는 듯하다. 유령에 대한 소문도 돌았다. 놀랍게도 작품에 등장하는 샹들리에 추락사고(1896년) 역시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이다. 당시 한 명이 사망하고, 수 명이 부상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원작자인 가스통 르루는 이 모든 것에 영감을 받아 소설 ‘오페라의 유령’을 탄생시켰고, 이 소설은 다양한 각색을 거쳐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완벽한 작품으로 제작돼 전 세계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사실 소설 자체만으론 당시 커다란 성공을 거두진 못했으나 감동을 배가시키는 아름다운 음악, 정상급 배우의 열연, 상상의 현실화가 만들어낸 하모니는 뮤지컬계 살아있는 전설로 전해진다.


 다시 무대로 돌아가 본다.

 시선은 파리 오페라 하우스의 경매장을 향한다. 무대 위엔 과거의 기억을 굳게 봉인한 채 잠들었던 물건들이 다시금 세상과 마주할 순간을 앞두고 있다.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무겁게 드리워진 장막이 걷히자, 곧바로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감쌌다. 거대한 위용을 드러낸 샹들리에에 환한 불이 켜지는 순간, 시간은 순식간에 과거로 거슬러 간다. ‘오페라의 유령’이 펼칠 마법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예술가이자 건축가, 기술자. 하지만 흉측한 외모를 타고난 유령이 아름다운 프리마돈나 크리스틴 다에를 남몰래 사랑하게 되면서 사랑의 경쟁자인 라울 드 샤니와 긴장감 넘치는 구도를 형성한다. 유령은 ‘음악의 천사’라 자처하며 크리스틴의 모든 것을 가지려 하나, 상황은 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유령의 끊임없는 집착은 그를 잔혹한 악마로 변화시켜 결국 모두를 벼랑 끝으로 몰아갔고, 급기야 사랑하는 크리스틴에게까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종용하게 만든다. 이처럼 흥미롭고 흡입력 있는 스토리는 멋진 무대 위에 빈틈없이 펼쳐지며 150분의 마법을 선사한다.     


 유령이 지배하는 어둠의 공간과 눈부시게 화려한 오페라 극장은 서로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극의 긴장감을 더욱 높인다. 관객들도 어느새 작품 속에 깊이 빠져들어 실제로 사건이 벌어지는 파리 오페라 하우스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유령의 목소리가 공연장을 둘러싸며 곳곳에 울려 퍼질 땐 마치 그가 실제로 공연장을 돌아다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장면들은 계속해서 펼쳐진다. 1막에서 유령이 크리스틴과 배를 타고 안갯속 호수를 건너는 장면은 ‘The Phantom Of The Opera’와 한데 어우러지며 완벽하게 각인된다. 수많은 촛불이 길을 밝힌 가운데 미지의 세계로 이끌려가는 크리스틴, 그리고 천상의 목소리로 그를 유혹하는 유령의 모습은 놀랍게도 실제 물 위에서 펼쳐지는 느낌을 들게 한다. 작품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 바로 이 장면이다.      


 샹들리에 신도 작품의 백미다. 각 공연장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첫 장면에서 솟아오른 샹들리에가 갑자기 흔들리거나, 무대를 향해 고속 낙하할 때 느껴지는 긴장감은 다른 작품에서 느낄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다. 샹들리에의 크기도 상당한데, 매 회 상승했다 낙하하는 모습을 연출해야 하기 때문에 뮤지컬에서 쓰이는 샹들리에는 특수 소재를 사용해 무게를 줄이고 하강 속도도 조절했다고 한다. 배우들도 샹들리에 신에서 정확하게 시간을 계산해 움직이지 않으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하는 부분이라고도 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음악이다. 극적이면서도 서정적이고, 강렬하게 귓가에 맴도는 음악은 작품의 매력을 극대화한다. 새로운 프리마돈나의 데뷔를 알리는 ‘Think Of Me’나 대표 넘버인 ‘The Phantom Of The Opera’, 라울과 크리스틴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부르는 ‘All I Ask Of You’ 외에 유령의 솔로 넘버 ‘The Music Of The Night’, 2막 1장의 문을 여는 ‘Masquerade’도 빼놓을 수 없는 곡이다. 본능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The Point Of No Return’ 역시 위기의 순간에 욕망으로 뒤엉킨 마음을 잘 알면서도 저항할 수 없이 이끌려버리고 마는 감정을 아찔하게 잘 표현했다.

 뮤지컬 속 오페라를 만나는 재미도 상당하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는 유령이 작곡한 오페라 3가지(‘한니발’, ‘일 무토’, ‘돈 주앙의 승리’)가 등장하는데, 이처럼 독특한 구성은 흔치 않다. 모든 곡은 실제 존재하는 오페라 일부를 따온 것이 아니라 오직 작품만을 위해 창작된 곡이다.    

  

 작품의 매력과는 별개로 유령을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 복잡하다. 때로는 너무나 가엽다가도, 또 때로는 그저 차갑게만 보인다. 참 신기한 일이다. 빗나간 사랑과 집착은 결국 유령이 범죄까지 저지르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하지만 세상에 버림받은 그가 욕심냈던 것은 오직 단 하나, ‘크리스틴의 마음’이었기에 더 애달프다. 시작은 더없이 순수했을 것이다. 크리스틴의 음악적 성장을 지켜본 기쁨, 세상에 하나쯤은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 태어나 처음으로 느낀 이성적 설렘과 감춰야만 했던 욕망까지. 결국 그 사랑에게조차 악몽을 선사하고 말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일찍이 사랑받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더라면 이 모든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타깝기도 하다. 크리스틴도 그의 진심을 알았기에 마지막 입맞춤으로 영원한 안녕을 대신하지 않았을까. 결국 분노로 뒤틀린 유령의 마음을 녹인 것은 사랑이었으니 말이다. 작품 전반에 깔린 진실한 사랑과 희생에 담긴 가치는 오래도록 빛을 낸다. 가상의 오페라 극장에 한해서만큼은 유령의 마음을 꼭 감싸 안아주고 싶은 이유다.


 전례 없는 전 세계적 위기로 인해 모든 것이 멈춰버린 요즘이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코로나 대유행 이전의 세계는 이제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고도 한다. ‘일상’이라는 단어가 어느새 낯설어지고 말았다. 브로드웨이 밤거리를 쉴 새 없이 빛내던 유령의 전용 극장도 빛을 잃었고, 서울 공연 역시 멈춰 섰다. 당분간 공연장에서 직접 유령을 만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언젠가 공연장을 찾을 당신을 변함 없는 모습으로 반길 것이다.     


 유령이 남기고 간 붉은 장미가 떠 오른다.

 오늘 밤엔 ‘오페라의 유령’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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