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아마데우스>
“이제부터 우리는 영원한 적(敵)입니다!”
간절히 바랐던 신의 선택이 자신이 아니었음을 확인한 남자. 그는 높은 곳에 있는 신을 향해 날 선 전쟁을 선포한다. 돌아선 뒷모습, 울분에 가득 찬 목소리엔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복잡한 감정이 담겼다. 음악의 신동을 뛰어넘지 못한 범재로 기억된 자. 바로 이탈리아의 작곡가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다.
‘아마데우스’는 말의 눈을 잔인하게 찌른 소년과 정신과 의사 사이에 펼쳐진 심리전을 담은 ‘에쿠우스’와 ‘고곤의 선물’, ‘블랙 코미디’ 등으로 유명한 영국 대표 극작가 피터 셰퍼(Peter Levin Shaffer)의 또 다른 작품이다. 1979년 발표된 원작 희곡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연극은 모차르트 독살설에 무게를 두고 제작된 1984년 작 영화 ‘아마데우스’와 유사한 흐름을 갖는다. 2018년 한국 초연 당시 세밀한 감정 묘사와 극적인 스토리, 화려하면서도 독특한 무대 연출, 배우들의 눈부신 열연으로 주목받았다. 그로부터 2년 뒤, 다시 돌아온 ‘아마데우스’는 더욱 섬세해진 모습으로 최고의 무대를 선보이며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 과연 모차르트를 죽인 사람은 살리에리였을까?
극 제목은 ‘아마데우스’지만 작품에서 집중 조명을 받는 이는 놀랍게도 살리에리다. 그는 자신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휩싸인 채 모차르트 사망 이후 무려 32년간 고통 속에서 살아온 인물로, 작품 속 서술자의 역할을 병행한다. 노인이 된 살리에리의 회상과 함께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진행된 연극은 155분 동안 빈틈없는 전개를 펼쳤다.
항상 신을 섬기리라 기도하던 살리에리. 그는 신의 도구가 되어 음악으로 신을 찬양할 것을 약속한다. 젊은 나이에 오스트리아 빈 궁정악장 자리에 오를 만큼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지만, 모차르트가 등장한 후로 모든 것이 뒤엉켜버리고 만다. 실제로 살리에리의 실력 또한 남달라서, 요제프 황제의 많은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요제프 황제가 가진 음악적 안목 이야기는 차치하고서라도 살리에리의 작곡 실력이나 음악적 재능에 대한 평가는 명확하다.
또 그는 교육자로서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그가 가르쳤던 대표적인 음악가 중 한 명이 바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다. 베토벤이 생전 남겼던 편지나 대화록을 보면, 그가 스승 살리에리를 얼마나 존경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다. 또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 역시 살리에리의 가르침을 받았다. 살리에리는 어린 슈베르트가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살려 당대 최고의 음악 교육원이었던 빈 슈타트 콘빅트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왔다. 낭만주의 음악으로 시대를 풍미했던 프란츠 리스트와 피아노를 쳐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카를 체르니도 마찬가지다.
이런 살리에리가 갑작스레 빈에 입성한 모차르트를 가볍게 여길 리 없었다. 음악의 신동이었단 소문대로 그의 실력은 대단했고, 모차르트가 지닌 천재성에 경이로움을 느끼기까지 한 살리에리다. 심지어 그가 지닌 천부적 재능을 곧바로 알아보고야 만 살리에리에겐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의 재능을 알아보는 재능을 부여하다니, 어찌 보면 참 잔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보수와 질서를 대표하는 인물의 앞에 나타난 자유와 파격의 대표자. 게다가 철없는 모습을 숨기지 않는 괴짜 청년 모차르트에게 그토록 탐날만한 재능을 줬다니 말이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동경하면서도 동시에 질투를 품으며 스스로 고통받기 시작한다.
그 뒤로 살리에리는 자신이 가진 음악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나, 끝내 모차르트의 능력을 뛰어넘지 못하리란 사실을 깨닫는다. 그토록 섬기며 갈망하던 신의 선물이 ‘신의 은총(아마데우스를 뜻하는 말)’ 모차르트를 향했다는 사실은 살리에리에게 커다란 좌절감을 안긴다. 가질 수 없다면 망가트려야만 했다.
“욕망을 줬으면 재능도 줬어야지!”
결국 그는 신을 향해 영원한 전쟁을 선포하고 저주를 퍼부으며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길을 걷는다.
모차르트가 작곡한 음악은 대단했지만 당시 음악가들에겐 워낙 새로웠기 때문에 호불호가 분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거만하고 건방진 태도도 귀족들과의 사교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후 살리에리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모차르트를 궁지에 몰아넣고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 베버를 자극하는가 하면, 그가 엘리자베트 공주의 음악 교사가 되는 일이나 황제에게 인정받을 기회를 막아서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는 살리에리를 친구라 믿으며 마지막까지 간절히 도움을 청한다.
▪필립 헤레베헤, 샹젤리제 오케스트라의 모차르트 레퀴엠 '라크리모사' (출처: CrediaTV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q_6qvo6ngAY
지칠 대로 지쳐버린 모차르트는 생애 마지막까지도 소모품처럼 채근당하며 오로지 살기 위해 작곡을 이어가고 약해진 생명의 불씨는 점점 더 흐릿해져 간다. 그러던 어느 날, 정신적 지주이자 트라우마로 남은 아버지 레오폴드가 사망하고 콘스탄체마저 떠나간 상황 속에서 외로이 남겨진 모차르트에게 갑자기 검은 망토를 둘러쓴 남자가 나타나 진혼곡인 레퀴엠 작곡을 의뢰한다. 단, 이 곡을 의뢰받았단 사실을 절대 발설해선 안 된다는 조건을 건다. 모차르트는 떠나간 아버지를 떠올리며 두려움에 떨다가 마지막 오페라인 ‘마술피리’를 완성하며 그림자 같던 아버지의 존재와 화해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남은 레퀴엠 K.626 작곡을 계속한다.
연극에서는 이 진혼곡의 작곡을 의뢰해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압박한 것이 살리에리였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레퀴엠을 의뢰한 자는 따로 있었고, 그가 이 곡을 의뢰한 이유도 모차르트를 압박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우선 빈 음악계에 자자하게 퍼져갔던 모차르트 독살설이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은 러시아 문호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의 희극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였다. 살리에리가 사망한 후 6년 뒤 발표된 내용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야기와 같다. 그의 희극은 두 사람의 음악적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끝내 질투에 눈이 멀어버린 살리에리의 인간성 타락을 이야기하며, 악행을 저지른 자와 예술이 동행할 수 없다고 말한다. 독약을 먹은 채로 연주하는 모차르트를 보며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는 살리에리도 인상적이다.
실제로 말년의 살리에리는 종종 자신이 모차르트를 죽였다고 주장해왔다 한다. 이를 두고 라이벌 모차르트를 시기했던 그가 죽음을 앞두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신의 죄를 자백한 것이라 보는 사람들도 있다. 또, 모차르트는 죽기 전 자신의 몸 상태가 급격히 좋아지지 않자 아내 콘스탄체에게 누군가 자신에게 독약을 먹이려 하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대해서는 갖가지 설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현대의학으로 충분히 밝힐 수 있었던 병증 중 하나가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던 모차르트가 내연의 관계를 맺었던 여인의 부군이 독약을 먹게 했다는 말도 있다.
- 모차르트의 마지막 미완성곡, 누구를 위한 진혼곡인가
다시 연극으로 돌아가 본다. 모차르트는 레퀴엠을 작곡하며 이 곡이 자신을 위한 헌정곡이 될 것 같단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의 예견은 사실이 됐다. 위태롭게 울린 바이올린의 현이 선율을 이끌고 절정을 향해 치달으며 합창으로 울려 퍼질 때, 모차르트가 떠올린 악상을 살리에리가 받아 적어 내려던 장면이 겹쳐지면서 감정은 더욱 고조된다.
죽어가는 모차르트에게 절규하며 용서를 구하는 살리에리와 그런 그를 향한 모차르트의 모습은 순간 살리에리가 그토록 원망하고 저주했던 신과 같았다. 아마 살리에리는 쓰러져가는 모차르트의 모습을 보며 더 큰 좌절을 느꼈을 것이다. 신의 대리인이자, 신이 선택한 천재 역시 본질은 평범하고 나약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과연 자신이 그에게 무슨 짓을 해 온 것인지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운명처럼 엮어 조종한 신에 대한 배신감과 자신을 향한 환멸까지. 어쩌면 모차르트가 남긴 미완성 진혼곡은 가엾은 살리에리를 위한 마지막 선물이 아니었을까.
연극 ‘아마데우스’의 배우들은 이토록 복잡한 인물들을 표현하는 데 조금도 거침이 없었다. 각기 다른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를 보는 것 또한 이 작품의 커다란 재미다. 그중에서도 특히 살리에리로 분한 차지연의 열연은 눈부실 만큼 돋보인다. 넘치는 힘과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무대 곳곳을 누비던 그는 누가 봐도 완벽한 살리에리였다. 주체못할 감정이 폭발해 분노하고 포효하는 장면에서도 차지연은 기품을 잃지 않으며 탄탄한 중심을 유지했다. 그는 이번에도 역시 자신만의 확실한 캐릭터 ‘차살리’를 새로이 구축해냈다.
또 최근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로 대중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는 박은석의 모차르트도 눈길을 끈다. 극 초반부 살리에리에게 집중되던 조명이 2막에 이르러 모차르트를 향한 순간, 가볍고 철없던 모습의 천재는 사라지고 고독감에 사로잡혀 빠르게 시들어 간 한 유망한 청년의 존재감만을 부각한다. 이렇게 빈틈없는 두 사람이 그린 살리에리와 모차르트가 함께 레퀴엠 악보를 완성해가는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큼 묵직하게 울린다.
여기에 오케스트라의 생동감 넘치는 연주가 더해지면서 화려한 무대는 더욱 풍성해진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고조되는 감정, 감출 수 없는 욕망이 격해지는 과정은 실제 모차르트의 음악과 편곡이 가미된 연주로 더욱더 명확하게 표현된다. 또, 유명 오페라 곡을 직접 현장에서 생생하게 듣는 감동도 남다르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으나 고통으로 얼룩진 삶에 쫓겨 외로운 삶을 마감해야 했던 모차르트와 전형적인 틀 안에서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다한, 가장 성공한 음악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극복하지 못한 열등감 때문에 끝내 자신을 파멸로 이끈 살리에리. 기존 체계와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끊임없이 파격과 변화를 추구했던 천재는 마지막까지 외로이 싸우다 홀로 스러졌다. 어둠 속에서 빛을 그리다 생의 끝자락에 이르러 진심 어린 용서를 구하는 살리에리의 모습은 뭉클한 감상으로 다가온다.
죄책감이란 이름의 십자가를 내려놓게 된 살리에리는 과연 행복했을까.
판단은 관객들의 몫이다.
음악사에 길이 남을 두 음악가의 비극적인 삶과 화려했던 여정을 새로이 조명하며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깊은 감동을 남긴 연극 ‘아마데우스’가 하루빨리 다시 날아올라 모두에게 잔잔한 위로가 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