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레베카(2020)> : 다시 열린 판도라의 상자
다시, <레베카>다.
저항할 수 없는 매력과 강렬한 존재감으로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레베카와의 재회. 그것도 글로벌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와 손을 잡고 알린 화려한 귀환이다.
지난 10월 21일,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레베카(Rebecca)>가 전격 공개됐다. 그보다 앞선 10월 9일에는 풍성한 색감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담아낸 메인 포스터와 예고편을 동시에 선보이며 관객들의 기대감을 한껏 높인 바 있다. 게다가 할리우드를 뜨겁게 달군 톱스타 릴리 제임스, 아미 해머가 주연을 맡아 다시 맨덜리 저택의 문을 열게 됐다는 소식은 새로운 <레베카>를 꼭 봐야만 할 이유이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사랑받는 스테디셀러 <레베카>. 전설은 ‘서스펜스의 여제’ 대프니 뒤 모리에가 쓴 동명 원작소설(1938년 작)로부터 시작됐다.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에 그칠 것이라 예상했다면, 그런 생각은 완전히 접어두는 것이 좋다. 고딕 소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레베카>엔 로맨스와 스릴러, 미스터리 등 흥미로우면서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재가 모두 담겼다. 또, 이 작품을 현 시대의 관점에서 재해석했을 때 발견하게 되는 쾌감도 색다르다.
지금까지 <레베카>는 영화와 연극, 뮤지컬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되며 변함없는 사랑을 받아왔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불후의 명작 <레베카(1940)>는 80년 전에 제작된 영화라 보기 어려울 만큼 돋보이는 영상미와 감각적이면서도 우아한 미장센을 자랑한다. <사이코>, <새>, <현기증> 등 독자적인 연출 기법으로 스릴러 영화의 1인자라 불려온 그는 원작자인 대프니 듀 모리에를 마치 뮤즈처럼 여겼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영화 곳곳엔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세밀한 심리묘사와 히치콕 작품 특유의 긴장감 가득한 분위기 덕분에 수많은 영화 애호가들이 손꼽는 클래식 스릴러 영화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되었으며, 히치콕 감독은 <레베카>로 할리우드에 본격 진출해 제1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촬영상을 받았다.
▪뮤지컬 <레베카> | ACT 2_ | 옥주현, 이지혜- EMK뮤지컬컴퍼니 공식YouTube 채널
2021년 여섯 번째 시즌 공연을 예고한 뮤지컬 <레베카> 역시 주목해 볼 만하다. 세계적인 뮤지컬 명콤비 미하엘 쿤체와 실베스터 르베이가 히치콕 감독의 영화로부터 영감을 받아 새롭게 탄생시킨 작품은 2006년 오스트리아에서 초연을 했고, 2013년부터 한국 무대에 올랐다. 이후 류정한, 엄기준, 카이, 신영숙, 옥주현 등 최고의 스타 캐스팅과 더불어 매 시즌 매진 행진을 거듭하며 ‘믿고 보는’ 뮤지컬로 자리매김했다. 뮤지컬 <레베카>는 한정된 무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몰입도를 확실하게 높였고, 인물들의 복잡한 감정을 중독성 있는 멜로디에 담아 주옥같은 넘버들로 탄생시켰다. 또 극 전반에 한국적인 감성을 가미해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벤 휘틀리 감독이 연출을 맡게 된 이번 넷플릭스 <레베카>는 기존에 선보였던 작품들과 확실한 차별화를 추구한 모습이었다. 원작의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부분에선 과감히 새로운 설정을 가했다. 미스터리 스릴러가 세련된 분위기와 현대적인 감각을 덧입고 빠르게 휘몰아치듯 펼쳐지면 2시간 3분에 걸친 러닝타임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게 흘러간다.
▪<레베카> | 공식 예고편 | Netflix - YouTube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검은 바다가 거친 물결을 일렁이며 다가온다. 꿈과 환상의 경계에서 깨어난 순간, 드디어 <레베카>의 마법이 시작된다. 놀랍게도 작품의 주인공은 레베카가 아니다. 주인공인 나의 회상은 과거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휴양지 몬테카를로의 여름날로 향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름 한번 드러나지 않는 젊은 아가씨(릴리 제임스)는 경제적인 도움이 필요하단 이유로 밴 호퍼 부인의 시중을 들며 살아간다. 그러던 중 잠시 머문 호텔에서 부유한 신사 맥심 드 윈터(아미 해머)와 운명 같은 만남을 갖게 된다. 원작에도 이 여성의 이름은 마지막까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으며, 뮤지컬에선 나(I)로 등장한다. 맥심은 부인 레베카와 사별한 후 자신의 저택인 맨덜리를 떠나 있던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첫눈에 반한 듯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어 아슬아슬하면서도 로맨틱한 관계를 이어가고, 불꽃처럼 튄 사랑은 뜨겁게 타올라 결국 결혼에 성공한다.
밴 호퍼 부인과 작별한 뒤 남편이 된 맥심을 따라 새로운 드 윈터 부인의 자격으로 맨덜리에 입성하게 되지만 마주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하인들은 그다지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경직된 분위기로 일관하는 집사 댄버스 부인의 태도도 심상치 않다. 처음엔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한 삶을 꿈꾸며 들어선 저택이었지만, 알면 알수록 전 부인 레베카의 존재감은 상상 이상으로 더 묵직하게 다가온다. 집안 곳곳에 녹아든 레베카의 취향과 레베카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기억이 점차 가늠할 수 없는 무게가 되어 나를 짓누르고, 급기야 붉은 드레스에 길게 늘어뜨린 어두운 머리칼을 지닌 레베카의 환영에 사로잡히기 시작한다.
과거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피하는 남편 맥심, 심리적인 자극과 위압감을 주면서 새로운 드 윈터 부인을 압박하는 댄버스 부인, 그리고 유령처럼 저택을 떠돌며 저택을 지배하는 레베카의 그림자와 비밀스러운 맨덜리엔 과연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 넷플릭스 <레베카>는 속도감 있는 전개와 화려한 볼거리, 아름다운 음악들로 러닝타임 내내 관객들을 깊이 몰입하게 한다.
사실 이번 넷플릭스 <레베카>에 쏟아진 평가는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워낙 다양한 콘텐츠로 재탄생됐던 작품이라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관객들의 평가는 전반적으론 호평에 가까웠지만 해외 평단의 반응은 엇갈렸다. 각색을 거치는 과정에서 로맨스가 강화되며 긴장감이 떨어지고, 원작에 담긴 세세한 묘사가 약해진 부분은 확실히 아쉽다. 그러다 보니 스토리의 이해를 도울만한 전체적인 설명이 조금 부족한 느낌도 든다. 일부에서는 새롭게 추가한 설정이나 다듬어지지 않은 여주인공을 표현한 방식에 어색함을 토로하는 반응 또한 종종 눈에 띈다.
또, 이전에 만났던 ‘레베카’가 과연 어떤 ‘레베카’였는지도 감상평에 주요한 영향을 미치리라 예상된다. 만약 뮤지컬 <레베카>에 좀 더 익숙한 입장에서 본다면 뮤지컬보다 영화 속 댄버스 부인의 존재감이 그다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 다소 실망감을 느낄 수 있다. 댄버스 부인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으려면 인물이 품은 심리에 좀 더 집중했어야 했다. 안타깝게도 이 부분은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 느낌이라 그가 던진 마지막 외침이 자칫 공허하게 느껴질 지 모른다.
하지만 넷플릭스 영화 <레베카>만이 지닌 강점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먼저 <레베카>의 아름다운 영상미와 흡인력 있는 전개는 많은 관객으로부터 충분히 사랑받을 만하다. 장소와 시간 변화, 그리고 장면 속 분위기가 고조됨에 따라 달라지는 색감은 영화라는 콘텐츠의 성격을 더욱 확실하게 부각한다.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몬테카를로는 따스한 색감을 지닌 노란빛이나 황혼의 행복을 예고하는 듯한 주황빛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맨덜리 저택에 입성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푸른 빛이 감돌던 저택은 때때로 칠흑같이 검게 물들면서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 상태와 더불어 레베카의 그림자에 잠식되는 감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체감하게 한다.
무르익은 배우들의 연기도 넷플릭스 <레베카>를 더욱 빛나게 하는 요소다. 릴리 제임스는 모든 것에 서툴지만 순수한 주인공이 점차 레베카의 그늘에 짓눌려 열등감과 질투에 휩싸여가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아미 해머 역시 신사다운 매력으로 여심을 사로잡다가도 상황에 따라 예민하고 냉정하게 변하는 맥심 드 윈터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그뿐만 아니라 댄버스를 연기한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의 흔들림 없는 연기도 인상 깊다.
마지막으로, 이미 너무나 잘 알려진 명작을 단순히 리메이크하는데 그치지 않고 차별화된 <레베카>를 창조하는 방향을 선택한 벤 휘틀리 감독의 과감한 선택은 다양한 해석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원작을 포함해 각기 다른 콘텐츠로 제작된 <레베카>와 비교하며 보는 재미, 그리고 한편으론 오히려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관객들의 상상력을 이끌고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한 점도 커다란 매력이다.
분명한 것은 이번에도 역시 <레베카>였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