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만
아주 어린 시절부터 수백번도 더 했던 질문들.
뚱뚱하다고 놀림을 받을 때,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작은 행동으로 누군가가 피해를 볼 때.
억울함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던졌었고,
나이가 먹어서는 도대체 풀리지 않는 일들을 바라보며 나만 너무 불행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곰곰히 돌아보면 그래도 학창시절 공부를 좀 한다는 친구들은 집에서 대우를 받고 살던데.
왜 아빠는 내 잘못도 아닌데 언니와 싸웠다며 내 뺨을 안경이 날아가도록 때렸을까.
왜 엄마는 중간고사기간 아침에 별일도 아닌 것으로 화를 내며 멍이 들도록 물건을 던졌을까.
좋은 대학을 나오면 그래도 밥벌이는 하고 살던데,
난 도대체 왜 서빙 알바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왜 남편은 밥도 곧잘 하고 아기도 잘 돌보는 나를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을까.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수도 없이 던지다 지쳐서 항아리 속에 꽉 묻어두었던 질문이 다시 솟아오른다.
그런데 양상이 사뭇 달랐다.
하나님, 왜 저는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이렇게 직장에서 대우를 받아요....?
저보다 훨씬 일도 잘하고 훌륭한 분들이 저한테 존대를 해요. 지나가면 인사를 해주세요.
그리고.. 제가 이제는 과장이 되었대요. 세상에.
하나님, 왜 저만.. 이래요?
.
.
.
인사발령이 났다.
꼭 합격자 발표처럼 안절부절을 못하다가도 일이 생기면 정신이 팔려 신경을 쓰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전화가 막 울려서 받아보니 사람들이 축하한다는 말부터 하기 시작했다.
읭...?
ㅁㅁㅁ(내이름) 을 0000 (현재 있는 기관의 다른 부서) 과장 에 보함.
와.. 이렇게 되었구나.
말하기 복잡한 기관내부의 사정이지만 아무튼 언감생심. 생각하지도 못한 자리였다.
아이를 위해서는 이 기관에 남겨지는 것이 최선이었다.
더이상 어린이집을 옮기며 혼란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고,
사이가 어색하기는 해도 친정과도 그나마 가깝고, 이제는 운전도 익숙해졌으니 교회도 안정적으로 갈 수 있다.
하지만 수도권의 과장 자리는 이제 갓 3년이 되어가는 나같은 초짜 사무관에게 돌아오는 자리가 아니다. 전례를 살펴보면 이제는 지방으로 반드시 가야하는 차례였다. 사실 조직 입장에서는 같은 기관에 다른 부서로 또 발령을 낸다는 것 자체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위험부담이 크고 야근을 해야하는 이 기관의 비선호자리였다.
누구나 기피하는 자리를 1지망으로 쓰자.
그러면, 남겨줄 명분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것저것 챙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
아이만 변동이 없으면 모든 것을 다 감수할 수 있다.
이제까지 여성이 맡은 적이 없는 일이지만 할 수 있다.
오히려 나는 지난 1년 반 동안 이 기관에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기관 사정을 잘 알고 있고, 빠르게 대처할 수 있다고 우겼다.
내가 진짜 할 수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사실 정말 못할 것 같다.
하지만 못해도 해야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으면 오히려 잡념이 사라진다.
무조건 버텨야하는 시간이라고 마음을 먹으면 힘은 들겠지만 인생이 심플해지는 것이다.
마음을 굳게 먹고, 만일에 대비하여 틈틈이 이사방법을 검색하고 있었는데,
세상에. 이렇게 생각지도 못하게 일이 풀려버리다니.
하나님, 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시는 거에요...?
태어나서 한번도 하지 못했던 질문을 던지고,
눈물이 차오른 눈에 힘을 주어 눈물을 지우고.
사람들과 덕담을 나누며 새 사무실로 짐을 옮긴다.
드디어 괜찮아졌다.
이사를 가지 않아도 된다. 어린이집을 옮기지 않아도 된다. 야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순식간에 다, 괜찮아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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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이 생활에 익숙해져서 잘 기억도 나지 않는 몇달 전의 일을 떠올려 보았어요.
인사발령이 나고서 저와 가장 가깝게 지냈던 나이든 계장님은 저에게
"정말 잘되었습니다. 참 잘되었어요. 저는 과장님이 착하게 살아서 이런 복을 받는 구나 했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처음 발령 받아 와서 안팎으로 혼란스럽고 힘들기만 했던 때가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래도 진심이 전해지게 해달라고 엎드려 기도하던 제 모습도 떠올랐어요.
언제나 그렇듯 기도가 이루어지는 순간은 참 기쁩니다.
주님이 제 이야기를 듣고 어루만져주신 것이 세상 모든 일보다 제일 기쁜 일이에요.
이제 아이는 충분히 자고 8시에 일어나 8시 15분에 저와 함께 집을 나섭니다.
저는 유연근무를 해서 5시 반이면 회사를 나가 아이를 찾으러 어린이집에 가요.
여유가 있으니 밤에 조급하게 아이를 닥달해서 재우지 않아도 됩니다.
저녁을 먹이고는 산책을 나오기도 해요.
더 많이 웃고 더 즐겁게 이야기합니다. 재미있는 활동도 많이, 하구요.
필요할 땐 육아시간도 쓰고,
외출을 해서 아이관련 일을 보거나 점심약속을 잡는 것도 가능해졌어요.
정말로 꿈도 꾸지 못했던 꿈같은 날들을 지나는 중입니다.
오늘 저희 부서에서는 상반기 중 가장 큰 일 하나를 치뤘어요.
총 15명의 20대에서 50대까지의 남자직원들과 뿌듯하게 일을 마치고 커피를 마시자고 하니,
앞에서 부서원의 주문을 받아온 제일 막내 직원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과장님 카드..." 하는데,
정말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모자라고 부족한데 과장님이라 불러줘서 고맙고,
또 제가 커피산다고 저렇게 좋아해줘서. 눈물이 핑 돌도록 너무너무 고마운 하루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읽어주셔서 공감해주시고 응원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