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서영 Jul 01. 2018

화랑유원지 내 추모공원

2018년 6월 30일 304 낭독회에서 낭독한 글입니다

혐오감에 대해서 생각했다. 부엌에 나타난 바퀴벌레를 가볍게 가지고 노는 고양이와 그 바퀴벌레가 혐오스러워서 의자 위에 올라가 내려오지 못했던 어느 새벽에 대해서, 술에 취해 지하철 의자에 반쯤 드러누운 냄새가 지독한 행인의 옆에 서서 앉을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 자리를 피해버렸던 3호선에 대해서. ‘그켬’이라는 소셜미디어의 댓글이나 콧등을 찡그리는 얼굴 표정들에 대해서.


모든 혐오감이란 접촉하는 것에 관한 혐오감이라고 했다. 이것에 닿았을 때 내가 위험해지지 않을까, 무서운 질병이 옮아오지 않을까, 사람들이 나를 더러워졌다고 여기지 않을까. 어떤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눈을 벌겋게 붉힌 비둘기를 볼 때, 또 어떤 사람들은 하수구 속으로 재빠르게 사라지는 시궁쥐를 볼 때, 또 또 어떤 사람들은 큰 소리로 발정기를 알리는 고양이를 볼 때 그런 두려움을 느낀다.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폭력은 노골적으로 모두에게 두려우니 오히려 편하다. 댓글로 욕설을 하고 편안하게 눈을 감는다. 하지만 가만히 누워 눈을 감고 있을 때 마음 한 구석을 조용히 맴도는 두려움은 그런 게 아니다. 낮에 종이로 내려친 파리의 몸에서 비어져 나온 회색 내장, 침대와 베개에 가득하다는 진드기, 내 얼굴에도 산다는 모낭충, 간절한 부탁을 무시하고 지나갔던 기억, 나를 노려보던 노숙인의 얼굴, 구제역에 걸려서 떼로 폐사되는 돼지들, 공원 어귀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비명, 모두에게 미움 받는다고 확신하는 우울한 소년, 한 쪽 눈을 잃은 고양이, 꼬챙이처럼 비썩 말라 죽어가는 다섯 살 아이.


이런 것들이 무서울 때는 제대로 앞을 볼 수가 없다. 두려움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다. 사실은 별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두려워하는 마음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 겁을 먹은 마음은 편파적으로 움직인다.

무서운 서사의 주인공들은 복수하기 위해 돌아온다. <월하의 공동묘지> 속 기생 월향은 자신을 배신한 남편과 자신을 착취한 세상 때문에 원혼이 되었다. 월향을 원혼으로 상상하며 두려워하는 건 월향과 같은 처지의 사람이 아니다. 월향을 죽음으로 내몰았기에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포영화를 보며 두려워한다. 살아있을 때 고통 받고 괴롭힘 당하다가 사라져 간 생명을 까맣게 잊을 수는 없으니까. 아무리 잊으려고 해 보았자 그 고통 위에 단단하게 세상을 만들어 왔으니까.


무서운 걸 견디지 못해서 비열해지기로 하면 멸시할 수 있게 된다. 아예 세상에 그런 게 존재하지 않는 척 하고 고개를 돌린다. 모기 소리를 무시하면서 귀를 막고 이불을 덮어쓰는 것처럼, 그 수많은 무서운 것들을 머릿속에서 탁 비어내 버리는 것이다. 완전히 무시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편안하게 잠이 들 수 있을 것이다.


계단을 오르는 두 다리 바깥은 생각하지 않는다. 결혼반지를 끼고 부른 배를 소중하게 끌어안은 부부의 모습 바깥은 생각하지 않는다. 흰 머리를 곱게 빗고 음료수를 손에 든 채 공원을 헤매는 노인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괴로운 표정을 한 모든 무서운 것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우선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부터 잊어버리기로 한다.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누군가를 세게 쳤을 때 굳이 돌아보지 않기로 한다. 마치 그런 일은 없었던 것처럼 바쁘게 앞으로 걸어 나간다. 머뭇거리다보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에 발목을 잡힌다. 그러면 지금처럼 빠르게 걸어나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두려움도 있게 마련이다.


두려움을 잊지 못해서 화가 나면 증오하게 된다. 무서운 것들을 한 군데에 몰아넣고 거대한 이름을 붙인다. 무서운 것들 뒤에 어마어마하게 강대한 적이 있다고 생각해 버린다. 저런 끔찍한 것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에이즈에 걸릴 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이 망해버릴 수도 있다. 소중한 재산을 다 빼앗아갈 것이다. 불행해질 것이다. 무서운 것들이 날카로운 칼끝으로 나를 겨누고 있다고 생각하면 화가 난다. 별다른 피해를 끼치지 못할 것처럼 겉으로는 꾸며대고 있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거대한 악의 무리인 게 틀림없다.


증오하게 되면 거리를 둘 수 없게 된다. 증오하는 이는 증오하는 것과 가장 가까이 있지만 동시에 가장 멀리 있다. 증오하는 것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증오하는 이지만 가장 잘 모르는 것도 증오하는 이다. 정확하게 거리를 두는 게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을 증오하는 마음은 자랑스러워하게 마련이다.


무서운 건 위협적이지 않다고 끊임없이 되뇌이는 이들도 있다. 저대로 내버려두어도 무관할 것이라고, 가만히 내버려두면 두려움은 알아서 스러지고 다 나아질 것이라고 소망을 한다. 무서운 것들이 한밤중의 침실을 습격할 때면 정오의 찬란한 햇빛만을 상상하는 것이다. 정오의 찬란한 햇빛에 대해서만 꿈꾸는 이들은 또다시 병든 밤이 돌아온다는 것을 자꾸 잊어버린다. 소망하는 이들은 그렇게 소망을 믿게 되는 저주를 받는다. 몸이 아파도 죽어가는 자신을 절대로 알아차리지 못 할 것이다.


무서운 것들을 못 본 척 하건, 무시하고 잊어버리건, 증오하고 괴롭히건 간에 무서운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무서운 것들은 그 자리에 똑똑히 서서 투명한 눈으로 직시한다. 사람들은 제각기 여러 대안들을 만들어보지만 아무리 예쁘고 못생긴 말들을 짜깁기해서 보자기를 덮어씌워도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을 바꿀 수는 없다. 결국 피하지 못하고 마주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들켜 버릴까봐 두려울 테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두려움과 함께 살 수밖에 없다는 걸 받아들인다. 왜 두려운지 무엇이 그 안에 숨어있는지 꼼꼼하게 살피고 부적절하거나 적절하게 지각하고 이해한다. 어렴풋이 두려워하고 더듬거리면서 손을 내민다. 그때쯤 되면 무서운 기억들은 두려워하는 이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로 세상을 까마득하게 바꿔버리고 말 것이다. 밝은 낮에도 피하지 않고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도 겁에 질리지 않을 터다.


어제 비몽사몽간에 나는 이 글에 대해 생각을 했다. 꿈속에서 글을 완성했고, 몇 번씩 다시 읽은 다음에야 꿈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썼던 글은 무척 무서운 글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완성한 글을 옮길 수는 없었다. 무서운 글자들이 나를 완전히 다 떠나갈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야 자판을 두드릴 수 있었다. 이제 이 글은 무섭지 않다.




이 글을 쓸 때는 지방선거 기간이었고 경기도 지사 후보와 안산 시장 후보는 '세월호 납골당'이라는 문구를 플랜카드에 붙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 구호를 외치면서 청와대 앞에서 시위도 했다. 그냥 있던 글을 낭독해도 된다기에 썼던 소설들을 뒤지다가 그 모습들을 보며 새 글을 쓰기로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