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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Jeong Nov 27. 2018

3편:: 이럴려고 내가 여길 왔나

9개월 아기와 친정엄마가 함께하는 발리 한달살기


아침이 오면 모든 게 다 환상적일 것만 같았다

정신없는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다가왔다.
대개 여행지에서의 첫 아침은 짹짹거리며 예쁘게 우는 새 소리 라던가, 수탉의 울음소리라던가, 그게 아니면 빗질을 하는 소리에 깨는데 아기와의 여행에서 그런 고상한 소리와 햇살에 눈을 뜬다는 건 엄청난 사치다.
말 그대로 눈을 뜨고 싶어 뜬 게 아닌 아이의 우렁찬(?) 배변과 함께 시작했다고나 할까.....
아직 해도 안 떠 깜깜한 아침인데 아가는 벌써 옹알옹알 거리며 신이 났다. 아이를 씻기자 그제서야 닭이 운다.
이미 여섯 시도 안 된 시각에 전원 기상을 해 버린 상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아침밥을 먹을 가게도, 우리가 지내는 호텔 레스토랑 문도 아직 열지 않았다. 가져온 재료들로 밥을 지어 허기를 달래고 집 밖으로 나와본다.
깜깜한 밤을 뚫고 도착했기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서야 하나씩 담기기 시작한다.
야자수, 수영장, 짜낭, 뭐 그런 것들.



발리에 가면 발에 채이도록 보는 짜낭. 하루 세 번, 신을 위해 올리는 발리니즈들의 마음이다.




송정 해수욕장 아니고 발리 맞아요.

집에서 십분 조금 안 되는 시간을 걸어가니 해변이 나온다.
발리의 석양 명소, 더블식스비치다.
석양 명소를 나는 이 꼭두새벽에 왔네 그려?
뭐 앞으로도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둘러보기로 하고 발리에 첫 발을 내딛은 부모님을 위해 바닷가 산책에 나선다.
바다 바람을 정통으로 맞으니 정신도 퍼뜩 들고 기분도 꽤 좋아진다.
아기도 내심 기분이 좋은지 방실방실 웃는다.
그렇게 더블식스비치를 따라 죽 걷다가, 커피 한 잔이 고파진다.


근데 이 주변엔 괜찮은 카페가 없다.
그렇다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커피를 마시기엔 우린 이미 좀 들뜬 상태였기에 흥을 가라앉히고 싶지 않아 택시를 잡아타기로 했다.
잠깐 산책 나온다고 애기 물건은 아무 것도 안 챙겨 나왔는데 괜찮겠지....싶은 마음이 한 0.3초 스쳐 지나갔지만 뭐 별 일이 있겠나 싶어, 그래 택시 타고 그리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 싶어 블루버드 택시를 잡아 탄다.
택시를 타고 10분 남짓을 달려 도착한 비치워크 쇼핑몰. 발리에 온다면 꼭 한 번쯤은 가보는, 꾸따에 위치한 쇼핑몰이다.
h&m부터 자라, 폴앤베어 등등 한국에서도 만날 수 있는 (그래서 왜 오나 싶기도 하지만 정말 한 번은 가게 되는) 다양한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다. 우리가 너무 이른 시간에 나와서인지 아직 쇼핑몰은 개장시간 전이었지만 다행히 1층에 위치한 카페들은 이른 시간부터 브랙퍼스트 메뉴를 주문 받고 있었고 우리도 한 켠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자리를 잡고 토스트 메뉴 하나와 시원한 롱블랙 세 잔을 주문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는 찰나,
손주를 안고 있던 엄마가 갑자기 외쳤다.





비치워크 1층에 위치한 카페. 9시 전에도 오픈하니 아침 메뉴를 즐기러 오기도 좋다.


“애 똥 싼 거 같은데?”


와, 망했다. 어쩌지.
정말 아무것도 준비 안해왔는데. 설상가상 옷도 다 버렸다.
아 신이시여, 제가 잘못했습니다....벌써부터 이런 시련을 안기지 말아주세요.........엉엉.......
애는 애 대로 찝찝하지, 나는 나대로 난감하지.
아니 나는 도대체 왜 애 기저귀 가방도 안 챙겨 나온거야. 정말 내 머리를 오조오억번 쥐어박고 싶었다.
쇼핑몰 안에 아기옷과 기저귀를 파는 곳이 있지만 문제는 개장하려면 적어도 30분은 지나야 했다.
심지어 개장 시간이 정확하지도 않아!
열시~ 열시반 언저리쯤 연다고 하니 30분이 아니라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할 지도 모르는데.

메뉴를 취소하려니 저 멀리서 예쁜 플레이팅을 한 토스트가 서버의 품에 안겨 걸어온다.
토스트고 뭐고 지금 애 기저귀를 갈아야 할 판인데.
엄마와 아빠와 난 누가 뭐랄 것도 없이 토스트를 입에 우겨 넣는다.
이게 뭐가 들어갔고, 무슨 맛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계산을 빨리 하고 나가야 하니까.






엄마! 빨리 가자고!!!!



미터기 택시를 잡아 타야 하는데 모르겠다 일단 보이는 택시나 잡아 타자 싶어 돈을 더 주고 택시를 탄다.
(생각이 짧으면 시x비용으로 나가는 돈이 이렇게나 크다 흑... 엄마가 미안해.)
이 근방의 해안도로는 일방통행이라 스미냑 > 꾸따 방향은 막히지 않는 길을 찾아 온 동네 골목을 다 돌아 가는데 정말 불행 중 다행히도 꾸따 > 스미냑 방향은 돌아가지 않고 직진만 하면 되기에 다행히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크게 막히지 않는다.

 
뭐 그 이후론, 아기가 또 언제 어디서 배변활동을 펼칠 지 몰라 지레 겁을 먹어 하루 종일 집 안에 머물기로 했다.
근처 로컬 식당에서 먹으려던 미고랭도 집 안에서 먹고,
수영장에서 노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아가는 그 이후로도 몇 번의 배변활동을 더 거쳤다.





나도 물에 들어 가고 싶다! 날 넣어 달라!

아기를 재우고 젖병을 씻는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진이 빠져서.
물어보진 못했지만 아마 엄마는 앞으로의 한 달이 깜깜했을 것이고, 아빠는 명색이 퇴직기념 여행인데 첫날 한 거라곤 고작 쇼핑몰에서 커피 마시고, 작은 호텔에서 면 요리를 먹은 것에 실망했을 것이다.
수만가지 생각이 머리에서 맴돈다.
이건 도무지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 여행이 될 듯 했다.





이럴려고 내가 여길 왔나.




“안되겠다 엄마.
내일도 시터 올 수 있는지 물어볼게.”

아이를 재우고 부랴부랴 챙겨 먹은 추억의 쓰리킹스 피자는 고젝의 실수로 다 식어빠져 도착했다. 되는 게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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