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월 아기와 친정엄마가 함께하는 발리 한달살기
아침이 오면 모든 게 다 환상적일 것만 같았다
정신없는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다가왔다.
대개 여행지에서의 첫 아침은 짹짹거리며 예쁘게 우는 새 소리 라던가, 수탉의 울음소리라던가, 그게 아니면 빗질을 하는 소리에 깨는데 아기와의 여행에서 그런 고상한 소리와 햇살에 눈을 뜬다는 건 엄청난 사치다.
말 그대로 눈을 뜨고 싶어 뜬 게 아닌 아이의 우렁찬(?) 배변과 함께 시작했다고나 할까.....
아직 해도 안 떠 깜깜한 아침인데 아가는 벌써 옹알옹알 거리며 신이 났다. 아이를 씻기자 그제서야 닭이 운다.
이미 여섯 시도 안 된 시각에 전원 기상을 해 버린 상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아침밥을 먹을 가게도, 우리가 지내는 호텔 레스토랑 문도 아직 열지 않았다. 가져온 재료들로 밥을 지어 허기를 달래고 집 밖으로 나와본다.
깜깜한 밤을 뚫고 도착했기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서야 하나씩 담기기 시작한다.
야자수, 수영장, 짜낭, 뭐 그런 것들.
집에서 십분 조금 안 되는 시간을 걸어가니 해변이 나온다.
발리의 석양 명소, 더블식스비치다.
석양 명소를 나는 이 꼭두새벽에 왔네 그려?
뭐 앞으로도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둘러보기로 하고 발리에 첫 발을 내딛은 부모님을 위해 바닷가 산책에 나선다.
바다 바람을 정통으로 맞으니 정신도 퍼뜩 들고 기분도 꽤 좋아진다.
아기도 내심 기분이 좋은지 방실방실 웃는다.
그렇게 더블식스비치를 따라 죽 걷다가, 커피 한 잔이 고파진다.
근데 이 주변엔 괜찮은 카페가 없다.
그렇다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커피를 마시기엔 우린 이미 좀 들뜬 상태였기에 흥을 가라앉히고 싶지 않아 택시를 잡아타기로 했다.
잠깐 산책 나온다고 애기 물건은 아무 것도 안 챙겨 나왔는데 괜찮겠지....싶은 마음이 한 0.3초 스쳐 지나갔지만 뭐 별 일이 있겠나 싶어, 그래 택시 타고 그리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 싶어 블루버드 택시를 잡아 탄다.
택시를 타고 10분 남짓을 달려 도착한 비치워크 쇼핑몰. 발리에 온다면 꼭 한 번쯤은 가보는, 꾸따에 위치한 쇼핑몰이다.
h&m부터 자라, 폴앤베어 등등 한국에서도 만날 수 있는 (그래서 왜 오나 싶기도 하지만 정말 한 번은 가게 되는) 다양한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다. 우리가 너무 이른 시간에 나와서인지 아직 쇼핑몰은 개장시간 전이었지만 다행히 1층에 위치한 카페들은 이른 시간부터 브랙퍼스트 메뉴를 주문 받고 있었고 우리도 한 켠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자리를 잡고 토스트 메뉴 하나와 시원한 롱블랙 세 잔을 주문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는 찰나,
손주를 안고 있던 엄마가 갑자기 외쳤다.
“애 똥 싼 거 같은데?”
와, 망했다. 어쩌지.
정말 아무것도 준비 안해왔는데. 설상가상 옷도 다 버렸다.
아 신이시여, 제가 잘못했습니다....벌써부터 이런 시련을 안기지 말아주세요.........엉엉.......
애는 애 대로 찝찝하지, 나는 나대로 난감하지.
아니 나는 도대체 왜 애 기저귀 가방도 안 챙겨 나온거야. 정말 내 머리를 오조오억번 쥐어박고 싶었다.
쇼핑몰 안에 아기옷과 기저귀를 파는 곳이 있지만 문제는 개장하려면 적어도 30분은 지나야 했다.
심지어 개장 시간이 정확하지도 않아!
열시~ 열시반 언저리쯤 연다고 하니 30분이 아니라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할 지도 모르는데.
메뉴를 취소하려니 저 멀리서 예쁜 플레이팅을 한 토스트가 서버의 품에 안겨 걸어온다.
토스트고 뭐고 지금 애 기저귀를 갈아야 할 판인데.
엄마와 아빠와 난 누가 뭐랄 것도 없이 토스트를 입에 우겨 넣는다.
이게 뭐가 들어갔고, 무슨 맛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계산을 빨리 하고 나가야 하니까.
미터기 택시를 잡아 타야 하는데 모르겠다 일단 보이는 택시나 잡아 타자 싶어 돈을 더 주고 택시를 탄다.
(생각이 짧으면 시x비용으로 나가는 돈이 이렇게나 크다 흑... 엄마가 미안해.)
이 근방의 해안도로는 일방통행이라 스미냑 > 꾸따 방향은 막히지 않는 길을 찾아 온 동네 골목을 다 돌아 가는데 정말 불행 중 다행히도 꾸따 > 스미냑 방향은 돌아가지 않고 직진만 하면 되기에 다행히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크게 막히지 않는다.
뭐 그 이후론, 아기가 또 언제 어디서 배변활동을 펼칠 지 몰라 지레 겁을 먹어 하루 종일 집 안에 머물기로 했다.
근처 로컬 식당에서 먹으려던 미고랭도 집 안에서 먹고,
수영장에서 노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아가는 그 이후로도 몇 번의 배변활동을 더 거쳤다.
아기를 재우고 젖병을 씻는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진이 빠져서.
물어보진 못했지만 아마 엄마는 앞으로의 한 달이 깜깜했을 것이고, 아빠는 명색이 퇴직기념 여행인데 첫날 한 거라곤 고작 쇼핑몰에서 커피 마시고, 작은 호텔에서 면 요리를 먹은 것에 실망했을 것이다.
수만가지 생각이 머리에서 맴돈다.
이건 도무지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 여행이 될 듯 했다.
이럴려고 내가 여길 왔나.
“안되겠다 엄마.
내일도 시터 올 수 있는지 물어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