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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Jeong Dec 11. 2018

5편:: 덤터기 맞았다


본의 아니게 자유부인이 되었다






아기가 캐시와 호텔의 온갖 잡동사니를 만지며 세상 구경을 하는 틈을 타 배낭을 메고 밖으로 나왔다. 
혼자서 호텔 밖을 떠나는 이 느낌이 싫지 않았다. 하긴, 한국에서도 자유부인의 날을 얼마나 학수고대하며 주말을 기다려왔던가.

캐시의 말대로 대형마트에 가면 콩분유나 특수분유가 있겠지 싶어 발리에서 가장 큰 까르푸에 가기로 한다. 
우리 집에서 까르푸까지는 차로 15분 남짓. 하지만 어디까지나 구글맵 시간이고 발리의 헬같은 교통체증을 뚫고 지나가면 이보다 더 걸릴 게 뻔한데. 
나는 처음으로 오토바이 서비스를 이용해 보기로 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Go-jek(고젝)'이라는 회사가 매우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재작년에 왔을 때까지만 해도 단순히 배달의 민족처럼 음식 배달 서비스에 그쳤지만 2018년 현재, 오토바이 택시부터 장보기 대행, 청소대행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미 어플을 설치한 상태로 한국에 왔기에 오토바이를 부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오토바이가 배정되면 내가 가는 목적지까지의 소요시간과 비용도 미리 확인할 수 있기에 바가지 쓸 일은 거의 없다.






오토바이를 배정받고 언뜻 보았던 차비는 오천 루피아(한국돈 약 400원가량)였다. 소요시간도 10분 남짓이기에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았고. 저 멀리서 까만 헬멧을 쓴 멀끔한 청년이 온다. 헬멧을 주기에 냉큼 쓰고 따라 탄다. 
학교 다닐 때도 워낙에 모범생이어서 오토바이 뒤에 타 본 적이 없는데 나이 서른이 넘어서야 이런 일탈 아닌 일탈(?)을 하다니. 이거 참 신나는데? 혼자 거의 비트 수준으로 심취해 매연 가득한 바람을 가르며, 동시에 오토바이에서 떨어질까봐 온 힘을 다해 고젝 청년의 재킷을 쥐어잡는다. 
10분도 안 돼 까르푸 입구에 도착한다. 아 좀 더 타고 싶은데, 거 참 가까운 곳에 있네.
앞에서 주머니 한가득 루피아를 꺼내 오천 루피아짜리를 찾는다. 이 놈의 나라는 단위도 큰데 지폐 위주로 쓰니 돈 꺼내 계산할 때마다 혼돈의 카오스가 찾아온다. 
돈뭉치를 정신없이 쥐고 있는 나를 보더니 고젝 청년은 파란색 오만 루피아를 쏙 뽑아간다.
이상하네, 분명 내 기억엔 오천 루피아였는데? 
내가 영 하나를 더 붙여봤나 싶어 이게 맞냐 물으니 사람 좋은 얼굴로 맞다고 한다.
그리고선 내 핸드폰을 잠깐 보여달라고 하더니 별 다섯 개를 체크해야 서비스가 끝난다며 톡 하고 별 다섯 개를 체크한다. 
그러면서 지도 나한테 별 다섯 개를 주겠다고 하네?
나는 '아 이것도 에어비앤비처럼 서로 후기를 좋게 남겨야 하는 건가 보다' 싶어 그러마, 하고 헬멧을 넘긴 후 뒤돌아섰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제길. 나 덤터기 맞았네.

오토바이 비용 눈탱이 당한 까르푸 입구.





상식적으로 여기까지 오는 택시비가 오만 루피아가 될 수 없다.
그 전날 까르푸보다 먼 비치워크에서 우리 집까지 올 때에도 삼만 루피아 정도 준 기억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 것이다. 
하물며 오토바이로 오는데, 택시비보다 더 돈을 준다고? 와 생각해보니 이 새끼가 진짜!
심지어 정신없는 틈을 타 자기 별점을 5개나 주게 하고 떠났다. 그래야 서비스가 종료되는 줄 알았는데, 뒤돌아 생각해보니 이건 신고도 못하게 하려고 만든 치밀한 계획이다.  
이미 이를 아득바득 갈아봤자 청년(이라 쓰고 그 새끼라 읽는다)은 떠났고, 서비스는 종료됐고, 다시 챗을 보낼 수 없다.
내가 그래도 어디 가서 헛돈 쓰고 다니는 스타일은 아닌데 이렇게 의문의 1패를 당하네.

하긴, 정신 똑띠 안 차리고 돈 계산한 내 잘못이지 누굴 탓하겠는가. 그리고 지금은 그 돈 찾으러 떠날 때가 아니라 애 분유를 사야 할 때니까.












까르푸에서는 사태류, 꼬치류, 각종 신선한 해산물을 믿고 (싸게라고는 안 했음) 구매할 수 있다.








(왼) 발리의 드래곤프루츠는 한국의 용과와는 달리 속살까지 빨갛다. (오) 여긴 상추를 화분째로 살 수 있네!


까르푸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특유의 그 냄새가 분한 마음을 가라앉힌다. 아줌마에게 마트 냄새란 아로마요법과도 마찬가지인 것.....

나라마다 마트에 베인 냄새가 조금씩 다른데 (우리가 코스트코에서 미제 냄새난다고 말하는 것처럼) 특히 동남아의 경우 각종 세제와, 비누와, 과일 등이 뿜어대는 오묘한 향이 기분을 참 좋게 만든다. 돈 쓰게 만드는 이 냄새, 정말 다시 맡아도 좋다니까.








발리 분유코너는 정말 대박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분유 코너를 찾긴 했는데, 뭘 어떻게 사야 할지 몰라 서성거렸다. 캐시가 분명 'soya susu'라고 적힌 걸 사라고 했는데 그렇게 적힌 분유는 또 왜 그리 많은지. 

우리야 고작 매일, 남양, 일동, 파스퇴르 정도의 브랜드가 있는데 그 갑절은 되는 분유 브랜드로 가득하다. 
다행히 한 직원이 도움이 필요하냐 묻는다. 어떤 브랜드를 사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니 브랜드마다의 원산지를 알려준다. 

이건 호주, 이건 네덜란드, 그리고 이건 일본꺼야-
butan은 아기 개월 수를 말하는 거고, 너희 아가는 몇 개월인데-?

유창한 영어는 아니었지만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내가 필요한 정보를 알려준다. 생각해보니 그녀는 타 분유 브랜드의 판촉직원이었던 것 같다. 
새삼 내가 한국의 마트에서 이런 세심한 서비스를 받아본 적이 있던가 싶다.
방금까지만 해도 차비 오천 원을 덤터기 맞았다고 광광거리며 속으로 화를 냈던 나는 어느새 발리의 이 친절함에 반해 역시 발리가 최고라고 마음을 고쳐먹고 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위로받는 꼴이다.








당분간 아이의 편안한 소화를 책임져 줄 분유.





#발리한달살기 #아기와해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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