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을 보내며 짤막하게 남겨보는 생각들
어떠한 결론이 있는 건 아니고, 매 순간 떠올려 왔던 것을 짤막하게 남겨보는 2021년의 마지막 날.
#1. 열흘을 내리 쉬면서 글 한 자 적지 못했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글을 쓰자고 생각하는데, 말처럼 되지 않는다. 창작의 고통은 정기성으로 해결될 수 없기 때문에 불규칙하게라도 글을 남겨야지. 남 얘기 말고 내 얘기. 올해도 발리 한달살이는 결국 끝내지 못했다 3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9편 남짓까지밖에 쓰질 못하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겠다.
#2.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메모장에 적어둔다. 근데 적어두고 다시 꺼내보질 않는 게 나의 치명적인 문제점인데, 나중에는 '이걸 내가 왜 적었더라?'하고 상황 자체를 잊게 된다. 정리를 하려고 '노력'은 하는데 체계적으로 하지 못하는 나의 큰 단점. 예전에는 고쳐보려고, 어떻게든 구획을 만들어서 거기에 차근차근 넣어두려고 했는데 그 구획을 까먹어서 결국 다 섞여버린다. 어쩌겠어 이게 나인걸. 인정하고 적당히 할 수 있을 만큼만 정리하자. 스트레스받지 말자.
#3. 아무튼 올해 메모장에 적어뒀던 문장들은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어디서 내가 홍보가 전문이라고 말할 수 있나, 부끄럽지 않게 할 수 있나? 앞선 길을 걸었던 선배들의 좋은 점은 물려받되, 나만의 에지는 만들긴 했나? 이미 남들이 다 아는 결과론적인 얘기를 또 내뱉은 건 아닌가? 차별화된, 하지만 대다수가 납득할 만한, 감정에만 호소하지 않고 설득까지 해낼 수 있는 결괏값까지 만들어낸 적이 있는가? 근데 이런 고민들이 결국 '남에게 인정받기 위함'에 대한 고민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표다.
#4. 위 고민들이 얽혀 처음으로 '학교에 다시 가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순전히 더 배우고 싶어서. 이래서 대학원에 가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논문 쓰는 건 고리타분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은 내가 좀 틀렸던 것 같다. 대학원 가고 싶다. 근데 뭘 전공하고 싶은지는 모르겠다. 나는 요즘 사람의 심리에 대해 궁금하다. '왜 저 집단은 저런 말을 할까?', '왜 사람들은 작은 것 하나에 매몰되서 전체를 잊게 되나?' 영화 돈 룩업을 보면서도 군중심리, 집단 심리에 대한 공부를 해보면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5. 좋은 사회 친구들을 만났다. 일로 만났지만 나는 또 일 얘기만 못하지... 그게 나야... 사회 친구들과 걷고 있는 길에 대해 답 없는 토론을 하면 그래도 서로의 연대 속에 위로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아무튼 올해도 배울 점 많고 속 깊은 사회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나만 '88 유니버스'라고 부르고 있는데, 대략 86~90 사이 친구들. 내가 아는 88 유니버스 친구들이 모두 모두 연결됐으면 좋겠다. 연대감 속에 새로운 무언가가 또 탄생할 것 같거든. 지루한 코로나 시국이 언제쯤 끝날지 모르겠지만, 내년엔 꼭 해볼 것이다.
#6. 이직을 했다. 위 고민들이 마음속에 뭉글거릴 때쯤이었고 내가 가는 길이 맞나, 내가 하고 있는 게 맞나 싶은 여름이었다. 결정을 했고, 내가 결정했으면서 나는 또 울었고, 마음이 정리될 때쯤엔 눈물이 나지 않았다. 고요해졌다. (대충 3n살까진 까까도 사주고 울면 눈물도 따까 주고 해야 한다) 이 시기쯤 누가 "한 10년 차쯤 되면 이제 부르는 데도 없고, 거기서 그렇게 쭈욱 가는 거야"라는 말을 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생각한다. 나는 틀린 쪽이 되어보고 싶었다. 밖에서 볼 때는 내가 선택한 길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이겠지만, 내 맘속에선 큰 결정이고 안 해본 것들을 결정해야 하는 책임감이 더 커졌다. 더 무겁게, 더 고민해서, 더 진지하게 하되 스스로가 잠식되지 않도록 해야지. 나라는 블록을 밑단부터 차곡차곡 잘 쌓아 나가야지.
#7. 뭔가 좋은 성과를 얻었을 때 '와 나 대박 잘 나가네?'하고 표현하고 싶을 때도 솔직히 가끔 있다. 근데 사람 인생이라는 게 항상 아우토반만 있는 게 아니니까... 언제 또 샛길로 길을 잘못 들지도 모르고, 장애물 앞에서 주춤거리거나 크게 사고가 날지도 모르는 거니까. 가끔 뽐 내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들다가도, 또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잘 나가는 저 사람도 고민 하나쯤은 있겠지, 자책하는 저 사람도 잘하는 게 있는데 왜 그럴까? 하지만 그 모든 생각 끝엔 #아그럴수도있겠당 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거다. 저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내 기준대로 생각하면 안 된다.
#8. 우아한 단어를 사용하되 피상적이진 않게 말하기. 친구들과 함께하는 나는 좀 우악스럽게 말하긴 한다. 어쩌라고 그게 난데... 하지만 일하는 나는 적어도 그런 표현은 피하려고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해야지. 남의 생각에서 내가 차용해서 쓸 수 있는 단어들과 표현들이 있는데 그런 부분을 좀 많이 배워야겠다. 요즘 똑똑한 사람들이랑 일할 기회가 제법 많아졌는데, 나도 다 잘 모른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아는 체해야 할 때도 필요하다. (대신 뒤에서 열심히 모르는 것 찾고 다음번 기회엔 진짜로 알고 있어야 함.)
#9. 그래서 배우고 익히는 시간이 주어진 지금이 좋다. 어쨌든 지금 회사에서는 행복하게 일하는 방법에 대해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모두가 공통의 행동과 언어로 얘기하니까. 행복하게 일하는 방법에 대해 말하는데 말과 행동이 불일치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땐 좀 힘들었다.
#10. 한 논문에 따르면 연봉 7만 5천 불 (한국돈으론 한 8천만 원 좀 넘는) 이상에서는 행복과 소득의 관련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나 또한 일정 수준 이상의 연봉이 되면서부터 '연봉 계약이 인생의 전부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많이 받을수록 좋겠지만 많이 받는다고 내가 그 돈을 잘 관리하는 것도 아니고, 소비가 엄청나게 늘지도 않는다. 그냥 적당한 가격의 브랜드로 입고 싶은 거 사고, 먹고 싶은 거 먹고, 여행 가고 계속 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어차피 나는 플렉스 하면서 만족감을 얻는 스타일도 아니긴 해서.... 자잘한 소비는 많이 하긴 하지만. 아무튼 올 한 해는 돈에 대한 고민을 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일 안 할 때는 돈에 대한 고민과 알게 모르게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가 제법 컸거든... 그 생각할 시간을 더 건강한 곳에 쓸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11. 올해는 도합 한 달 정도를 쉬었다. 회사 옮기면서 2주, 그리고 지금 회사에서 2주. 공교롭게도 둘 다 오빠가 해외에 있어서, 한 달 동안 엄마와 지후와 여행을 많이 다녔다. 엄마가 조금이라도 더 건강할 때, 많은 곳을 같이 다니고 싶다. 그리고 엄마가 여행 가서 자꾸 먹는 데에 돈을 안 아꼈으면..... 돈이 없어서 아끼는 게 아니라 30여 년간 그렇게 아껴 쓰는 게 습관이 된 사람에게 '돈 팍팍 써'는 오히려 고역일 수 있으니 더 강요는 안 하겠지만, 엄마가 이제 여행 가서 더 좋은 것 먹고 좋은 거 보고 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로 내년에도 엄마랑 지후랑 여행 더 많이 다녀야지.
#12. 며칠 전 상은님과 밥을 먹다가 '나는 직관적인 사람이에요!'라고 갑자기 유레카를 외쳤다. 나는 계산을 통해 도출된 내용을 설명하는 데는 매우 소질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떤 얘기를 들었을 때 머릿속에서 나도 모르는 전자두뇌가 발동해서 '엇 그건 아닌 거 같아요', '엇 그거 좋은데?'라는 결론을 바로 얘기한다. 사전에도 직관적은 '판단이나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이라고 나와있는데 아주, 매우 나를 표현하는 데 적합한 단어 같다. 나는 직관적인 사람이야. 나를 정의할 수 있도록 도와준 상은님께 감사를!
#13. 올해 혼자서 사부작 거리며 유튜브 영상을 몇 개 만들었다. 유튜버가 되고 싶어서라기보단 텍스트의 시대가 저물며 생각의 표현을 글로만 하는 걸로 고집 피우지 않으려고. 영상 편집 재밌다. 프리미어 프로는 못쓴다. 그래도 모바일로 할 수 있는 좋은 툴들이 많이 나와있다. 굳이 고퀄의 영상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글로 생각정리를 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처럼, 동적인 영상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법을 익히는 것. 하지만 마음을 먹었을 때 재밌지 '해야겠다'생각하면 또 재미없다.
#14. 골프를 배우고 있다. 남들 다 하는 골프, 어른들 비즈니스 하는 골프 도대체 왜 배우나 했는데 미쳤어 너무 재밌어.... 레슨 받을 때마다 공 잘 맞는 손맛을 느끼면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다. 나중에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운동이라고 하는데, 사실 가족과 시간을 더 보내기 위해 배우고 있다. 우리 가족이 다 같이 뭔가를 해본 적이 아마 초등학교 여름휴가 시기 말고는 없던 거 같아서. 내년에는 우리 가족들이 다 같이 운동도 할 수 있겠다. 신남.
#15. 매 해를 마무리할 때마다 '와 올해만큼 다이내믹한 해가 있었나'라는 생각을 한다. 대체로 좋은 의미라기보다는, 이것보다 나쁠 게 더 있을까의 의미로. 그런 의미에서 올 한 해는 34년 살면서 최고의 한 해였다. 그만큼 불안감도 컸다. 나는 가장 안정을 느끼는 시기에 불안함을 문득문득 느낀다. 최근에 영지가 그랬다. "땅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아득함을 느끼는 게 맞다, 불안함을 느끼고 있다면 높은 곳에서 잘 날고 있는 것이다"라고. 영지는 20살인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오늘도 한 수 배웁니다...
올 한 해 했던 잡다한 생각들을 다 텍스트로 털어버리고 나니 좀 후련한 마음이 든다. 아직 올해가 몇 시간 남았으니 그 사이에 또 생각나면 보태서 쓰는 걸로.
쓰고 싶은 말이 더 있었는데 까먹었다. 마무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