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감성이, 정성적인 것들이, 평가절하 받아야 할 이유는 뭔가.
똑똑하고 영민하고 좋은 학벌, 좋은 직장의 사람이, 인생 책이 무어냐 물어서 ‘한강의 소년이온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이 ‘저는 배움이 없는 소설을 왜 읽는지 모르겠어요’였는데, 순간 느껴진 감정이 모멸감이었다.
소설을 읽는 게 그만큼 가치없는 일인가? 지적자본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것인가? 라고 되내일 수록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뭐 결국 나만 괴로운 것이긴 한데 아무 생각없는 어떤 이의 흘러가는 말이었겠지만 순간적으로 느낀 멸시는 꽤 오래, 그리고 지금도 문득 마주하고 있다.
그 일이 있은 얼마 후 한강이 한국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소식에 나 혼자만 ‘거봐, 당신은 못 알아본 그 가치를 나는 봤다’하며 통쾌해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기억이나 할까, 그걸 알아본 내 안목을 아무도 기억해주고 귀담아주지 않는다는 씁쓸함이 남는다.
또 한 번은 나의 일에 방황하던 때에 누군가 ‘미안하지만 당신이 하는 그 일은 한국에선 계속 그런 대접을 받을 거다’는 말이었다. 분명 위로의 말이었는데 ‘아 똑똑하고 좋은 직장의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일의 수용도가 딱 이만큼이구나’라는 마음이 앞서 서글펐던 때가 있다.
매 연말마다 느끼는, 지나가는 감정이기에 마음을 매번 다스린다. 인정욕구가 유난히 큰 나는 매번 타인을 위한 샷아웃만 하다 스스로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놓쳐 허우적댄다. 상대방도 나에게 그만큼의 에너지를 쏟아 나를 인정해줄거란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시기가 딱 지금, 이맘 때. 그러다 결국 ‘내가 그만큼 인정할 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지, 결국 다 내 탓이야’라고 마음을 매듭짓는다.
사실 인정까진 바라지도 않고 멸시의 모먼트가 느껴지는 순간들을 어떻게 현명하게 받아칠 것인지가 더 필요한데 멸시를 극복하는 방법은 그렇게 느끼게 만드는 상황서 내가 내 멱살잡고 나오거나 이 마음을 다스리고 무시하며 갈길 가는 건라 두 갈림길에서 어디로 가야할 지 고민이 드는 요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