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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륜 May 10. 2021

돈키호테의 라이딩

자유는 황금으로도 살 수 없다_세르반테스


#물건을_버리기_시작했다. 이사 갈 집에 다 넣을 수 없을 테니 과감해지자. 세월의 흔적은 이 구석 저 구석 식구마다 다양하다. 쓸만한 것들은 중고로 팔아 이사비용에 보태볼까 열심을 내 본다. 정리하다 지쳐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니 지난 가을에는 라이딩을 못했다는 생각이 났다. 마음이 울컥 서러움이 밀려온다. ‘작년 이 맘 때 섬진강 자전거 길을 달렸는데. 황금들판 내려다보며 단풍 물든 벚나무 사이로 햇살 가르며 지나갔는데…’ 


#시아버지의_병환으로_일상의_즐거움이_멈췄다. 코로나가 창궐하기 시작할 때 아프기 시작하시더니 계속 쇠약해지시고 결국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 날씨가 유혹해서 자전거를 끌고 딱 두 번 나섰는데 그 때마다 병원에서 보호자를 찾는 전화가 왔다. 우리 부부는 새 봄을 맞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이사를 앞두고 자전거도 한 대 팔고 잠정 휴업 중이다. 


#달리지_못할_때는_읽는다. 동네책방에서 그 동안 읽고 싶었던 책을 사면서 재난지원금 전부를 썼다. 책상 위에 잔뜩 쌓아놓고 두께가 얇은 것부터 한 권씩 보기 시작한다. 시아버지 병실 한 구석에서도 간호하며 짬짬이 책을 읽는다. 삶의 무게가 견딜 만큼 익숙해지던 어느 날 갑자기 한 쪽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특발성난청이란다. 자전거 위에는 점점 먼지가 쌓였다. 나는 강을 따라 호기롭게 달려가다 넘어진 패잔병이 되었다. 

 

#자전거를_세워놓고_그냥_걷는다. 아침마다 한강변 공원에서 꽃과 나무를 찬찬히 살피고 돌아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하루를 버틴다. ‘그래, 눈이 안보여서 읽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 다행이다.’ 산책과 집안일 그리고 병원과 요양원. 라이더는 다사다난의 체인을 걸고 일상의 수레바퀴를 돌린다. 지나간 자전거 길을 추억하며 견디는 동안 계절이 두 번 바뀌었다.


#대신_떠나는_누군가의_이야기를_읽어보자. 스페인의 대 문호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의 <돈키호테> 1,2권. 읽다가 잠이 오면 목침으로 사용하기에 딱 좋은 두께다. 주인공과 스토리를 아는 사람은 많지만 완독한 사람은 드문 이상한 책이다.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준 소설의 성서와 같은 작품이다. 언론과 유명 대학들에서 필독서 100권을 선정하면 꼭 들어가는 단골 손님. 


#나는_고전읽기를_좋아한다. 특히 두꺼운 벽돌책을 꾸역꾸역 읽어가는 독서를 즐긴다. 자전거로 100km 의 거리를 꾸준히 달려가는 기분이다. 원기충전하며 책 표지를 열고 시작하다가 중간에 경치를 즐기려고 멈추기도 한다. 쭉 뻗은 지루한 길을 달릴 때는 무념무상하다가 언덕길을 만나면 기를 쓰며 올라간다. 고전읽기는 지루한 서사 사이에 숨어있는 통찰을 발견해가는 묘미가 있다. 라이딩과 닮았다. 도착지에 이르러서 맛보는 희열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독서와 같다. 끝내지 않으면 맛 볼 수 없다. 


#세르반테스는_독서_중독자였다. 길거리에 버려진 종이도 주워 읽었다고. 그는 세금징수원으로 일하다 1597년 은행의 파산으로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7 개월 동안 소설 돈키호테를 구상했다. 유명 작가들 중 역경을 겪어낸 경험으로 순위를 매기면 세르반테스는 최상위권이다. 인생의 희로애락은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설정으로 빚어졌고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이 또 다시 자신들 이야기를 풀어놓는 화려한 구조의 소설을 만들어냈다.


#돈키호테는_미친_라이더다. 책의 정식 제목은 <이달고 돈키호테 데 라만차>, 번역하면 스페인 라만차 지역의 하급귀족 정력남 정도 되겠다. 그는 틈이 날 때마다 기사소설에 빠져 집안 돌보는 일은 안중에도 없는 중년 늙은이다. 자신만큼 삐쩍 마른 애마 로시난테 위에서 스스로 편력기사라는 직무를 부여하며 길을 떠난다. 기사에게는 구원할 귀부인과 자신을 돌봐줄 몸종이 필요하다. 상상의 세계를 만들 때는 정성을 다해야 한다. 황당무계한 일을 행하려면 그림을 제대로 그려야 열정이 나오는 법. 한 때 짝사랑한 처자의 이름에 귀부인 칭호를 얹어 사명의 세례식을 행한다. 마누라와 자식을 버리고 기사 주인과 함께 고향을 떠나는 산초는 돈키호테만큼 미친 농부다. 돈키호테는 구원할 사람도 없는데도 모험을 불사하고, 산초는 무식한데도 섬을 통치하는 꿈을 꾼다.


#돈키호테는_근대시대_넷플렉스_시리즈다. 장을 넘길 때마다 다음 회가 궁금해진다.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는 세르반테스의 필력은 당대의 정치와 종교 그리고 신분의 문제들을 꿰뚫어낸다. 과연 돈키호테는 철학자인가 미치광이인가. 그가 추구하는 삶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지 세르반테스의 의중을 찾는 재미에 빠져 읽는 내내 즐겁다. 당시 사람들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삶의 즐거움이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글을 아는 사람도 적었을 당시에도 다양한 사연과 흥미진진한 모험담은 지친 몸과 마음의 활력을 주는 통로였다. 시대는 달라도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한 구석이 있다. 


#길_떠나면_개고생이다. 자전거를 타고 더위와 추위를 견디며 달려가 낯선 지방의 허름한 여관방에 지쳐 누울 때마다 항상 하는 생각. ‘나는 왜 여기 있나?’ 자문의 답은 언제나 하나다. 달려가는 그 길에 내가 있다는 사실. 목적이 아닌 과정이 살아있다는 기쁨으로 나를 채워주기 때문이다. 작가 세르반테스의 삶은 늘 목적을 위한 길이였지만 매 번 좌절하고 우여곡절을 겪으며 질고를 당했다. 부유한 집안의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학업을 힘들게 마쳤고, 전쟁에서 부상당했으며 해적의 습격을 받고 포로가 되었고, 왕명으로 비밀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으나 교회에서는 파문을 당했고, 두 번의 억울한 옥살이까지. 개고생을 밥 먹듯이 했던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의 입술로 비극과 희극의 하모니를 들려주면서 삶의 진수는 길 위에 있음을 증명했다. 


#남들은_미쳤다고_했다. 나도 돈키호테와 비슷한 나이에 라이딩을 시작했다. 몸을 아끼고 마음은 닫아가는 시기다. 중년의 아줌마를 미치게 만든 자전거는 길 위의 자유를 가르쳐주었다. 돈키호테는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가는 것이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분별력을 잃고 시작한 여행은 인생의 진리를 품고 사는 그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사람들은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자신들의 즐거움에 이용하며 치켜세우기도 한다. 돈키호테의 자유는 거짓 속에서도 진실했다는 아이러니가 소설의 근저에 흐르고 있다. 긴 독서를 마치고 아쉬움에 서문으로 돌아가본다. 세르반테스가 부른다. “한가로운 독자여~” 한 문장이 마음에 박힌다. 

“자유는 황금으로도 살 수 없다.”


#이사는_마무리_되었다. 작아진 집에서도 짐은 모두 제 자리를 찾았고 버려진 물건들은 다시 생각나지 않는다. 시아버지의 병환은 날로 깊어가고 나의 오른쪽 귀도 여전히 잘 들리지 않지만 책장을 정리하며 다음 읽을 책을 고르고 있다. 삶은 하루도 빠짐없이 일과 사연을 만들어 내지만 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내가 달려가기만 하면 다시 나에게 자신을 열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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