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륜 May 11. 2021

책으로 시작한 자전거 여행

자전거 여행_김훈



#책으로_여행을_배웠다. 오래 전 남편이 아이들과 함께 세계여행을 계획했다. 12살, 6살 두 딸을 데리고 미국에서 두 달간 여행 한 후 자신감이 생기자, 3 년 후에는 프랑스와 스페인을 종단하는 긴 여행을 떠났다. 일찌감치 여행공부를 시작한 남편을 따라 선배들이 써놓은 책들로 예습 복습을 했다. 세상은 넓고 사람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여행기는 눈으로 읽고 비행기에 올라 대륙을 건넌 내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겉돌았다. 아이들과 여행하는 동안 엄마인 나는 밥과 빨래를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쌓인 빨래하느라 시차 따위 무시하고 살아야 했으니까. 점점 일상의 팍팍함이 쌓이고 나를 짓눌렀다.


#책을_읽으려고_백수가_되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쉬기 위한 처방도 책이었다. <자전거 여행>은 집에 그냥 꽂혀져 있던 책 들 중 하나였는데 1권은 없어 2권만 읽었다. 처음 만나는 김훈이라는 작가. 이 책은 1999년 가을부터 2000년 여름까지 자전거를 타고 떠난 그의 여행기이다. 2004년에 출판사 <생각의나무>에서 발행되었는데, 2014년에 출판사 <문학동네>로 옮겨서 새롭게 구성되어 1,2권으로 발행되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1,2권을 다 구입하고 읽은 후, 문학동네 주최 행사에 참여하고, 김훈 작가와 함께 경기도 화성을 라이딩하고, 책에 직접 사인도 받았다. 나는 책의 세계를 즐기는 여행자가 되었다.


#책은_누군가에게_성서가_된다. <자전거 여행>은 갇혀있던 나를 구원한 자전거의 복음서다. 오래 전 열 살 소녀의 동네 한 바퀴 라이딩이 긴 동면에서 깨어났다. 꽃무늬 안장의 하늘색 자전거가 나의 첫 자전거였다. 아버지의 응원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빠가 잡고 있어! 괜찮아. 앞만 보고 계속 가!” 두 발의 힘으로 두 바퀴를 저어가며 쓰러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모든 힘이 몸과 자전거에 고르게 자리잡고 균형을 이룬다. 나는 그 방법을 너무 오래 잊고 있었다. 자전거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달리던 나에게 다가오는 자유의 바람을 어디에 묶어두고 살아왔는지. 자전거를 배우던 첫 날 넘어져 생긴 상처는 자랑스러웠는데, 불혹의 세월 속의 보이지 않는 상처에는 왜 마음을 닫아 버리고 발 밑에 돌부리만 원망했을까.


#책이_유혹한다. 책은 가보지 못한 곳을 펼쳐놓고 생각하지 못한 것을 부추긴다. 소설 속 주인공으로 변신하는 상상이라면 달콤하고 안전하기라도 하지. 책은 아줌마가 앞치마 벗어버리고 쫄바지 입고 두 바퀴 위에 앉아 힘차게 달리게 만들었다. 책 속의 단어들이 내 귀에 속삭이고 문장들이 가슴을 파고들어 심장을 두드린다. 김훈의 문장 속 풍경과 사람들은 잃어버렸던 소중한 것을 찾을 수 있는 지도 같다. 책 속에서 봄나물 냉이의 덕성과 달래의 시련이 헐거운 봄의 흙을 뚫고 나오는 애씀을 발견한다. 풀과 물과 산을 따라 간 김훈의 자전거는 섬진강 분교 아이들의 친구가 되었고, 만경강 염전의 짠맛과 햇볕의 향기를 맡았고, 충무공의 흔적을 따라 남해 푸른 물 위로 진도대교를 넘는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과 <칼의 노래>를 읽고 난 후 <자전거 여행>을 다시 읽으니 더 깊게 읽힌다. 그의 자전거는 소설의 시작을 함께 한 증인이 되었을 듯하다. 그는 신라의 군대가 개척했던 죽령도로를 넘어 부석사를 찾아가고, 모란시장 한복판에서 한국사회 개 팔자의 풍경을 관찰한다. (내가 김훈의 소설 중에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개>다.)


#책에서_자연을 읽는다. 김훈은 자연을 향해 기어이 말을 걸어야 하는 인간의 슬픔과 그리움의 노래

[1]를 듣는다. 인간이 풍경을 향해 끊임없이 말을 걸고 언어는 영원한 짝사랑으로 불완전을 완성한다는[2] 문장 위에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숲은 또 어떤가. 숲이라고 모국어로 발음하면 입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며[3] 모음에 실리고 울린 자음의 부드럽고 서늘함을 깨워주니, 사람들 마음속에서 이미 숨쉬고 있는 숲은 그의 글 속에서 살아있는 영혼이 된다. 소나무 숲의 향기는 말라있고 참나무 숲의 향기는 젖어있는지[4] 왜 몰랐을까. 김훈의 글을 읽으며 나는 큰 사치를 부린다. 언어의 사치. 보석처럼 빛나는 알들을 꿰고 또 꿰어 목에 걸고 바라보며 흐뭇해하듯 언어들을 걸고 누리며 즐거워한다. 빛나는 언어들이 나를 구원할 수 없다 해도 바라만 봐도 좋다며 사치를 부린다. 나는 자연을 읽는 새로운 눈을 이식 받았다.


#자전거_여행을_시작했다. 책을 읽고 난 후 내 자전거는 강을 따라 달리고 산을 끼고 올라갔다. 길에서 날렵한 자전거에 날씬한 몸을 얹어 바람처럼 지나가는 청춘들을 만나면 잠시 부러웠지만 멈추지 않고 달려가기만 하는 것을 보니 부담스러웠다. 나는 멈춰선 곳에서 바라보기 위해 달려가는 것이 좋았다.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종주한 후에야 강의 흐름을 볼 수 있었고, 달려간 길을 지도에서 찾아본 후에야 두물머리가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되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나는 얼마나 맥 없이 살아왔는가. 자전거 위에서 북한강의 깊음과 남한강 넓음의 색이 다르게 보였고, 물길을 따라 달릴 때 두 바퀴의 진동도 허벅지로 다르게 전해졌다. 책 속의 글로 무지를 깨우는 지식만이 아닌, 바라보고 집중하는 힘의 아름다움도 배웠다. 오래 전 젊은 내 아버지의 외침으로 시작했던 두 바퀴의 평형은 중년의 한 가운데서 내 몸의 힘을 빼고 마음을 연 후에 비로소 균형을 이루었나 보다.


#자전거_여행으로_新生했다. 내 자전거는 G사의 ESCAPE인데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이 검은 애마를 타고 김훈의 <자전거 여행> 속 여러 곳을 찾아갔다. 내리는 비 속에서 동해안의 바닷바람을 온 몸으로 맞고, 눈 쌓인 섬진강에서 얼어붙은 밤길도 저어갔다. 삼복 더위 속에 이화령 고개를 넘으며 오르막과 내리막의 진리를 땀에 새겼고, 벚꽃이 차오를 때는 봄 기운에 밀려 한강의 지류들의 깊숙한 곳까지 올라갔다. 나는 사진을 배우고 가르쳤던 사람이라 풍경을 찍는 줄만 알았는데 풍경은 쓸 수 있었다. 길 위에서 본 풍경을 사진으로 찍고 돌아와 글로 기억하는 시간이 쌓여갔다. 김훈의 글처럼 역사의 흔적까지 찾아보고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는 없었지만 내 산하의 선연한 아름다움은 나의 새로운 DNA 속에 새겨졌다. 그려진 풍경을 1차원으로 바라만 보다 내 허벅지의 힘으로 나아가며 4차원의 세계로 들어갔으니 달리며 이루어지는 신비는 내 자전거의 이름처럼 나를 탈출시켰다. 내 작은 삶에 갇혀 허우적거리다 두 바퀴의 날개를 달았으니 이름 값 제대로 했다.


          

[1] <자전거여행1> 146페이지

[2] 같은 책 147페이지

[3] 같은 책 59페이지

[4] 같은 책 102페이지



매거진의 이전글 돈키호테의 라이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