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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Jun 09. 2023

화개가 있지만 화개장터엔 안 가봤어

사주 명리학 그리고 인물과 운명의 외적갈등


사주를 100%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주는 통계학이다. 이런 사주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삶을 살 '가능성이 높을 수 있다'정도로 해석하면 좋을 듯하다. 사주를 믿지 않더라도 사주를 너무 사이비 혹은 샤머니즘으로 치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사주를 똑똑하게 활용하는 사람도 충분히 많으니 말이다. 어디까지나 조심할 부분은 조심하고, 나의 타고난 기질 중 보완할 부분은 다듬고,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부분은 발굴하는 쪽으로 활용하는 것 말이다.


지금이야 내 사주를 왜 그렇게 해석하는지 명리학 공부를 통해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지만, 지금보다 어린 시절 사주를 보러 가면 꼭 역술인의 헉스러운 표정을 봐야 했다.


그 표정의 이유는 평범하지 않아서였다.


평범하지 않은 사주네...
결혼은 꼭 늦게 하고... 꼭 서른 넘어서 가야 해. 안 그러면 두 번가.
이때까지는 미쳐 날뛰었겠는데?



나의 사주를 봐줬던 역술인들의 말들이다.


그 이유는 내 사주에는 양면성이 모두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안정성을 추구하는 사주, 자유를 추구하는 사주가 있다고 하자. 내 사주에는 그 두 가지 면이 모두 있다는 것이다.


그랬다. 내가 회사를 오래 못 다녔던 이유. 나는 안정성을 원하는 면모, 자유를 원하는 면모가 모두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회사를 다닐 땐 몸은 회사에 있지만 마음으로는 지독히도 자유를 갈망하며 영혼이 죽어있는 사람처럼 회사를 다니기도 했고, 또 자유를 갈망하며 퇴사를 했을 땐 자유 만끽은 찰나로 지나가고 불안정성의 불안감에 미쳐 날뛰다 다시 또 회사로 입사하곤 했다.


그렇게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로 이리저리 경계만 맴돌다 보니 이십 대가 지나갔다. 이젠 속하지 않으며 속하는 법을 터득해 가는 나이지만, 그때의 공허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이십 대를 지나 지금까지 내가 획득한 타이틀만 해도 6개, 지나온 회사만 해도 7개다.


이십 대에는 주로 마케터 혹은 기획자라고 불렸다. 이십 대에만 무려 7개의 회사를 지나왔다.

삼십 대에는 기자, 작가, 강사, 그리고 지금은 선생님이란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렇게 나는 이십 대를 지나 지금까지 내내 안정성과 자유. 그 두 가지를 적절히 섞어야 하는 나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두 가지를 삶에 조화시키기 위해 내 나름의 운명과 싸워왔다.


최근 획득한 타이틀이 선생님인 이유는, 앞으로 논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게 되었다.


역마살과 화개살이 있는 나에게


화개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글'과 관련된 직업인 글쓰기 선생님이. 그리고 수업 시간마다 변주를 줄 수 있고, 수업마다 다른 아이들을 만나는 은근한 역마를 충족시킬 수 있는 이 선생님이란 직업이 꽤나 잘 맞다고 느끼고 있다.




최근 '선생님'이 되었다는 나의 이야기를 들은 한 친구가 말했다.


"내 동생이 너 선생님 된 거 들으니까, 너랑 나랑 초등학교 때 너는 국어 선생님하고 나는 수학 선생님해서 소꿉장난 하던 거 생각난대 ㅋㅋㅋ"


생각도 안 나던 어린 시절이었는데. 내가 국어 선생님 역할을 했었다는 사실에 흠칫 놀랐다. 크면서도 뭔가를 잘 설명하는 내게 '선생님 하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말을 종종 듣긴 했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선생님이라 하면 교대 진학코스와 임용이 떠오르던 나였기에 그 지난한 길을 걸을 자신이 없어 고개를 저였다. 그런데 어찌어찌 글쓰기를 가르치면서 진짜 '선생님이' 될 줄은 몰랐다.


이렇게 작은 사소한 디테일적인 부분과 성향마저 사주의 큰 퀘와 맞아떨어지는 것을 점점 보게 되면서... 사주를 아예 못 믿지 않게 되었다. 현명했던 우리 선조들이 명리학을 공부해 온 이유가 있겠지... 사주도 은근 싸이언스라는 그 사실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가르쳐야 할 과목에 '문학 소설'도 있어서 오랜만에 문학 소설 공부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소설 속 인물이 겪는 '갈등'이라는 요소가 나온다.


갈등에는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이 있다. 내적 요인은 주인공이 홀로 내면에서 겪는 갈등, 외적은 외부적으로 다른 인물과, 혹은 사회와, 자연환경과, 운명과 대립한다는 내용인데. 인물과 운명이 싸우는 대표적인 예로 '김동리 소설가의 <역마>'작품이 있었다.


역마와 화개와 싸워온 내 운명 속에서. 어느 날 무의식 속에 있던 희망이었는지, 필연이었는지 모를 어릴 적 국어 선생님 소꿉장난을 하던 삼십 대가 된 내 앞에. 하고 싶은 공부로, 전달하고 싶은 내용으로, 문제점을 느끼던 교육이라는 큰 카테고리 속에서 이 직업인이 된 내게, 직업으로는 6번째 직업인 선생님이 되기 위해 준비기간을 보내던 내게 그 작품이 주는 의미는 꽤나 묘했다.




어떤 이는 말했다. 나는 사주 같은 건 절대 믿지 않는다고.

나 또한 그랬다. '운명은 정해져 있어' 같은 이야기에는 무조건 반감이 생기고, 드라마 이태원 클라스의 주인공 박새로이처럼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하겠다는' 진취면모가 종종 뿜뿜 하는 나이지만, 운명이 '결국 그렇게 되는 것 같아...' 하는 묘한 힘은 있는 것 같다는. 그런 것.


작가를 꿈꾸던 내가,

선생님 하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던 내가,

정말 작가라는 이름으로 살게 될 줄은,

글쓰기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될 줄은 몰랐다고...


어쩌면 그렇게 될 것이었는데, 그냥 스스로 믿지 못했던 거였는지도, 스스로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건 여담이지만 명리학과 사주를 공부하다 끌어당긴 또 하나의 작가 일도 있다.


운명은 조금 묘하다.

하지만 화개살은 있어도 아직 화개장터엔 안 가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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