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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백수 Jun 25. 2019

네 번째 슛: 난 바스켓맨이니까

당신은 어떤 정체성으로 살고 있나요?

 사람과 사람이 처음 만나면 서로 통성명을 하고, 바로 다음에 따라 오는 질문은 아마도 이런 게 아닐까. “실례지만, 하시는 일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나이, 사는 곳, 관심사 같은 것에 대한 질문은 보통 그 다음에 이루어진다. 최근에 한 술자리에서 어떤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도 내게 직업을 물었다. “저는 가수 겸 시인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하면 많은 사람들은 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직장에 다니거나 자영업을 하는 분들에게 내 직업은 다소 생소하게 여겨지곤 한다. 금융권에 종사한다는 그 역시 내 직업을 듣고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내게 조심스레 질문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이 조금 독특했다.


 “저,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시를 쓴다고 다 시인은 아니잖습니까. 시인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 정확한 규정은 아니지만 보통 제도권에서 시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신춘문예나 문예지 공모를 통해 작품을 발표한 사람들이에요. 이 과정을 등단이라고 하고요.”


 내가 언제부터 스스로를 시인이라고 소개하기 시작했는지를 떠올려보면 별로 어려운 대답이 아니었다. 나는 이천팔년도에 계간 <시와 세계>에 시를 발표한 이후로 스스로를 시인이라 소개하기 시작했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불리게 되었으니까.


 “아, 그렇군요. 그러면 혹시 가수가 되는 것에도 그런 기준이나 절차가 있나요?”


 가수의 기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시인이 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처럼 간단치가 않았다. 시인처럼 등단이라는 절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변호사나 의사처럼 라이센스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직장인처럼 근로계약서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이 사람이 가수임을 인증할 수 있는 국가공인 기관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대충 얼버무리긴 했지만 그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도대체 가수라는 직업은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 것일까. 가수란 무엇일까.


 노래를 불러 소득을 올리고 생활을 꾸려나가는 사람이 가수일까? 아니, 내 주변에는 훌륭한 음악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며 업계 내에서도 인정받고 있지만, 그것이 소득으로는 연결되지 못해 다른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나가는 동료들이 얼마든지 있다. 앨범을 내면 가수가 될까? 그 또한 틀린 말이다. 주변의 몇몇 사람들은 단지 취미나 호기심으로 앨범을 만들어 발표하기도 했는데, 그들을 가수라고 부르는 것은 서로에게 민망한 일일 것이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스스로를 가수라고 소개할 수 있게 된 것일까. 첫 앨범이 나오기 전부터 나는 홍대 앞의 작은 무대에 서서 “안녕하세요, 가수 강백수입니다.” 하고 소개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당위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런 사회적인 근거도 없이 그저 나 스스로 ‘그래, 나는 가수야.’라고 생각한 것만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결국 가수라는 말은 사회적 위치인 직업과는 별개로 스스로 규정하는 정체성인 것이다. 앨범을 내지 않은 채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더라도 스스로 가수라는 정체성이 있다면 가수일 수 있고, 취미로 낸 앨범이 어쩌다 화제가 되어 수익을 창출했더라도 그 정체성이 없다면 가수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슬램덩크 완전판 2권, 이노우에 다케히코, 대원

 농구를 시작한 지 한 달도 되지 않는 풋내기 강백호는 그를 탐내는 유도부 주장 유창수에게 단호한 얼굴로 선언한다. “난 농구를 할거야. 난 바스켓맨이니까.” 슛 조차 배우지 못하고 구석에서 팅팅팅 드리블 연습이나 하고 있는 주제에 그런 선언을 한다는 것이 터무니없을 수도 있지만 뭐 어때. 그렇게 스스로 규정하고 선언함으로써 정체성은 완성되는 것이다. 그동안 지루한 기초 훈련에 지쳐 방황하던 백호는 이 선언 이후로는 단 한번의 흔들림 없이 농구에 매진하게 된다. 그를 진정한 바스켓맨으로 만든 것은 북산고등학교 농구부에 제출한 그의 가입신청서도 아니고, 그것을 승인한 북산고등학교 농구부의 결정도 아니었다. 스스로를 바스켓맨이라 규정하는 행위였다. 정체성이라는 것이 소속이나 사회적인 위치보다 삶에 있어 훨씬 강력한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직업이나 소속이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들도 많고, 그래야 한다는 전통적인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사회적인 위치와는 별개의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든지 있다.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기업에 다니는 내친구 박대리는 하루의 대부분을 모 전자회사 사옥에서 보내지만 충분한 여건만 갖추어진다면 언제든 프렌차이즈 커피전문점을 차릴 준비가 되어 있다. 반도체건 아메리카노건 그의 귀여운 아들, 딸이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뒷받침 해줄 수 있다면 아무 상관 없다고 내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박대리라는 사회적인 위치보다 아빠라는 정체성을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결국 가족에 대한 그의 애착을 알지 못한 채 단지 그의 회사와 직함만을 기억하는 것은 그에 대해 절반도 알지 못하는 것이 된다.


 나와 함께 일하는 소속사 대표 송 형은 언제나 자신을 음반제작자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비록 그가 꾸려가는 음반제작사의 매출이 그의 가계를 책임지고 있지 못하고, 전혀 다른 일을 통해 생계를 꾸려가고 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음반제작사를 통해 자아실현을 해나가고 있다. 그에 대해 알기 위해 더 중요한 것도 그가 무엇을 통해 먹고 살고 있느냐 하는 일보다 어떤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을 알고, 그에 대해 무언가 묻고, 이야기를 들어도 그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는 느끼믈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내가 그가 하고 있는 일이나 사회적 위치만큼 그의 정체성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에 대해 진정으로 알고싶다면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가 아니라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를 물었어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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