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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백수 Apr 01. 2020

‘고향역’에서 ‘합정역’까지

쿨투라 2020.04

‘고향역’에서 ‘합정역’까지

-트로트 가사 속 역(驛)이라는 공간에 관하여


 강백수 (시인, 싱어송라이터)


  역(驛)은 트로트 노랫말의 배경으로 아주 빈번하게 등장하는 공간이다.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애창곡으로 자리매김해온 나훈아의 ‘고향역’(1972년)부터 수년 전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안동역에서’(2008년)을 지나 최근 트로트 붐을 일으키고 있는 유산슬의 ‘합정역 5번출구’(2019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노랫말들의 서사가 어느 역에서 발생해왔다. 김수희의 ‘남행열차’(1991년)나 송대관의 ‘차표 한 장’(1992년)의 인물이 타고 있는 열차는 어느 역을 떠나 또다른 어느 역으로 내달리고, 인물의 의식은 그 두 역 중 어딘가를 향하고 있으니 이들 또한 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노래라 할 수 있겠다. 다른 장르보다 압도적인 빈도로 트로트 노랫말은 역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역은 다양한 인간 군상이 모이는 곳이다. 어떤 이는 떠나고 어떤 이는 도착한다. 어떤 이는 마중을 나오고 또 어떤 이는 배웅을 나오기도 하는 곳이 역이라는 공간이다. 떠나는 이들도 저마다 다른 심경을 지닌다. 누군가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더 빨리 달리지 않는 열차를 야속해하며 마음 가득 설렘을 품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트로트 노랫말에서 역이라는 공간은 다양한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된다.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이쁜이 꽃뿐이 모두 나와 반겨주겠지

달려라 고향열차 설레는 가슴안고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코스모스 반겨주는 정든 고향역

다정히 손잡고 고개 마루 넘어 서 갈 때

흰머리 날리면서 달려온 어머님을

얼싸안고 바라보았네 멀어진 나의 고향역


<고향역>, 1972, 임종수 작사


 나훈아의 ‘고향역’ 1절 속 화자는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고향역을 향한다. 그리웠던 ‘이쁜이 꽃분이’가 나를 기다리는 고향역은 당장은 그리움의 공간이지만 머지않아 그리움이 해소될 공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정된 재회가 이루어지고 2절에 이르러 화자는 다시 고향역을 떠나게 된다. ‘흰머리 날리면서 달려온 어머님’과 ‘얼싸안’음으로써 이별하고, 고향역은 다시 멀어지고 만다. 그리하여 고향역은 다시 그리움의 공간으로 회귀하게 된다. 


바람에 날려버린 허무한 맹세였나

첫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

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덮는데

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오지 않는 사람아

안타까운 내 마음만 녹고 녹는다

기적소리 끊어진 밤에


어차피 지워야 할 사랑은 꿈이었나

첫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

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덮는데

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오지 않는 사람아

기다리는 내 마음만 녹고 녹는다

밤이 깊은 안동역에서


<안동역에서>, 2008, 김병걸 작사


 진성의 ‘안동역에서’에 등장하는 ‘안동역’은 전혀 다른 의미의 공간이 된다. ‘첫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던 일은 ‘바람에 날려버린 허무한 맹세’가 되어 ‘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덮’도록 재회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화자는 ‘안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알 수 없는 이를 새벽부터 기다리지만 ‘기적소리 끊어진 밤’이 되어 마지막 열차의 운행이 종료될 때까지 기다리던 이는 끝내 오지 않는다. 안동역은 재회가 좌절된 그리움의 공간이 된다. 그러나 이 그리움은 나훈아의 ‘고향역’의 그리움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다. 나훈아의 고향역이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기에 언젠가 해소될 그리움의 공간이라면, 진성의 안동역은 영원히 재회가 좌절된, 끝없는 그리움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상수 너는 망원 한 정거장 전에 내려

터벅 터벅 걷고 있는 이별을 앞에 둔 연인

합치면 정이 되는 합정인데 왜 우리는 갈라서야 하나

바람이 분다 사랑이 운다 아 합정역 5번 출구


정이 많아 정이 넘쳐 합정인 줄 알았는데

어쩌다가 그 역에서 이별을 불러야 하나

합치면 정이 되는 합정인데 왜 우리는 갈라서야 하나

바람이 분다 사랑이 운다 아 합정역 5번 출구


<합정역 5번 출구>, 2019, 이건우 유산슬 작사


 유산슬의 ‘합정역 5번 출구’에 등장하는 연인은 서로 반대편인 ‘상수’와 ‘망원’에서 합정역을 향해 가고 있다. 두 사람은 ‘이별을 앞에 두’고 있으며 그 배경은 공교롭게도 ‘합치면 정이’된다는 의미를 지닌 합정역이다.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 때문에 두 사람의 이별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 된다. 이 노래에서 합정역은 이별의 배경이 되는 공간인 동시에 당사자들의 감정을 더욱 증폭시키는 공간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재회가 이루어지거나 좌절되었건, 이별을 위해서 만나건 어쨌거나 이 노래들에서 공통적으로 활용된 역이라는 공간의 속성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만남은 그 전후에 소통의 단절이 전제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 하다. 나훈아의 ‘고향역’에서야 휴대폰 보급 이전인 1972년의 곡이니 고향역을 향하는 도중에 ‘이쁜이 꽃분이’와 전화통화 혹은 문자메시지를 통해 연락을 주고 받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당연하다. 김수희의 ‘남행열차’와 송대관의 ‘차표 한 장’에서도 열차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거나 출발해버린 상태가 완전한 단절을 의미한다는 점은 1990년대 초반이라는 창작시기를 고려해보면 수긍할 만 하다. 그런데 진성의 ‘안동역에서’는 이미 스마트폰까지 개발된 이후인 2008년도의 작품인데도 화자는 오지 않는 이에게 그 어떤 연락도 취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할 뿐이다. 작품 속 시대적 배경이 여전히 휴대전화가 보급되지 않은 과거의 어느 시대로 설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남과 이별 전후에 완전한 단절을 배치함으로써 역은 그리움이나 기다림이라는 감정을 더욱 안타깝게 이끌어내는 장치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2020년 현재 30대 중반인 필자만 해도 휴대폰 보급 이전의 기억이 거의 없기에 역이라는 공간에서의 만남 전후에 발생하는 단절의 감각을 생생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나 트로트의 주된 향유계층은 40대 이상의 세대이다. 그렇기에 트로트에서만큼은 역이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장치로 빈번하게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활용은 어느 새 일종의 클리셰로 자리매김하여 대중들로 하여금 트로트에 등장하는 역이라는 공간을 ‘무언가 좀 더 애틋한’곳으로 인식하게 하였다. 유산슬의 노랫속 연인이 ‘합정역 5번출구’에서 이별하는 것은 물론 ‘합정’이라는 지명을 활용한 언어유희에서 착안했을 것이겠지만 ‘합정동’이 아니라 ‘합정역’이어야 했던 이유에는 역이라는 공간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이 포함되어 있을것이다. 비록 상수-합정-망원을 지나는 6호선 노선은 휴대폰이 이미 널리 보급된 2000년대에 개통되었지만, 트로트의 주된 향유계층의 인식 속에서 역이라는 공간은 이미 앞서 말한 방식으로 자리매김하여 이별을 더욱 애틋하게 만들고 그 이후의 단절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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