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매거진 esc 300호 특집: 내게 만약에 300만원이 생긴다면
3천만원이 생겨도 술 사먹을 거야
재작년 8월, 나는 어느 방송사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을 했다. 유명 연예인들과 고민을 나누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럭저럭 즐거웠던 토크 후에 한 곡 부를 기회가 주어졌다. 그때 불렀던 노래가 ‘백수와 조씨’의 첫 번째 이피(EP)앨범에 수록되어 있던 곡, ‘아이 해브 어 드림’이라는 노래였다. ‘내가 만약 십만원이 생긴다면, 십만원어치 술 사먹을 거야’로 시작해서 ‘내가 만약 일조원이 생긴다면 일조원어치 술 사먹을 거야’로 끝나는 한심한 가사 덕에 나는 한동안 ‘루저 감성’ 충만한 ‘개그 뮤지션’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인디뮤지션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궁핍을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궁핍하게 살아오지도 않았다. 음악으로도 조금 벌고, 가끔 돈 떨어지면 다른 일도 하고 하면서 배는 안 곯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다 돈이 조금 남으면 부리는 사치가 바로 ‘술 사먹기’이다.
이건 정말 최고로 편리하고 즐거운 사치다. 만원이면 만원에 맞춰서, 십만원이면 십만원에 맞춰서 즐길 수 있다. 술을 마시다 보면 내가 누구인지(얼마나 저열하고 볼품없는 인간인지) 어렴풋이 알게 된다. 편리하게도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면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에 속상할 일도 없다. 열심히 마시다 보면 친구가 늘어나고 또 여자가 생기기도 한다.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처음 보는 아저씨와 형 동생이 되어 있기도 하고, 운이 좋으면 마음에 둔 여자와 입도 한번 맞출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지나치게 열심히 마시면 친구를 잃기도 하고 여자를 잃기도 한다. 그러나 만취한 친구들끼리 영문 모를 주먹을 뻗어 대고, 술에 취해 걸었던 전화 한 통에 사랑하는 그녀가 떠나가는 그런 사건들이야말로 노래를 만들고 글을 쓰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장사 밑천이 아닌가!
어느 날 갑자기 눈먼 돈 300만원이 생긴다면, 나는 당연히 술을 사 먹을 거다. 비싼 술 먹으면 한 번 술 먹고 없앨 수도 있는 돈이겠지만, 나는 아직 30년 된 술과 12년 된 술을 구별하지 못하니 여러 번에 나누어 먹어야겠다. 나를 위해 번 돈이 아님에도 기꺼이 나를 위해 지갑을 열어준,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 몇몇에게 각각 십만원짜리 보드카 한 병씩을 사고 향후 몇 년 동안 술을 얻어먹을 빌미를 만들거다. 겨우내 돈 나올 구멍 없어 힘들었을 뮤지션 동료들에게는 배 든든하게 족발에 소주를 대접할 거다. 날이 새고 해가 뜰 때까지 퍼부으며 온갖 이야기들을 만들어야지. 혹시 모르지. 그게 또 새로운 노래가 되어 나의 술값을 벌어줄지.
강백수 뮤지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