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알아먹게 해 주세요.........빌었지만 내가 너무 친절했나.
자기야 안녕?
제주 도착한 첫날
쭉 잘 자고 싶었으나... 하하
오늘도 문득 잠에서 깨 다시 잠들지 못하고
멍하니 있다 이 편지를 써.
문득 자기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사실 전부터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는데
타이밍을 놓쳐 말하지 못했어.
그러나 머릿속을 맴도는 말들이었지.
그래서 몇 자 적어보려 해 ㅎㅎ
(카톡으로 보내자니 길어질 듯하여 메일로 쓴다.)
얼마 전에 둘이 안방에 누워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기가 내가 우리 부모님을 (그러니까 내가 어머님, 아버님을) 무시하는 것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잖아.
나는 어머님 아버님을 싫어하지도 무시하지도 않아.
바로 얘기해주고 싶었는데
그냥 넘어갔던 것 같아.
내 마음을 간단하게 설명하기가 참 어려웠거든
그렇지만 기회가 될 때 꼭 얘기를 해주고 싶었어
나는 절대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아
빨리 말해주고 싶었어. 왜냐하면 자기 마음이 너무 속상할 것 같았거든
그렇잖아. 나 같아도 자기가 우리 부모님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면
너무 마음이 아프고 속상할 것 같은데.
그런 생각 안 하게 내가 내 마음을 잘 설명해야지 생각했어.
그런데 쉽지가 않았어.
나도 내가 어떤 마음인지 들여다보는 시간과 여유가 필요했거든
오늘, 잠에서 깨어 문득 그런 시간이 된 것 같아서 이렇게 적는다
(서론이 엄청 길다 그지? 하하)
내가 시부모님에게 느끼는 건....
불편함인 것 같아
그러니까...
(이 얘기도 했었잖아!! 할 수 있지만 조금만 참고 들어줘)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불편함 말이야...
감사하고 좋은 분들이시지만
나에게는 결혼한 지 십 년이 넘어도 불편한...
나를 편하게 대해 주시고 잘 대해주시지만
그것과 내 마음이 불편한 것은 별개인...
자기한테 와닿은 비유가 될지 모르겠는데
회사에서 실장님을 예로 들어보자 ㅎㅎ
실장님이 너무 훌륭하시고 잘 대해주셔도
그래서 인간적으로 좋아도 불편한 건 불편하잖아...
내 사적 영역이 있고 굳이 실장님과 공유하고 싶지 않고...
그런데 그런 실장님이 매일 아침 우리 집에 키패드를 누르고 들어오시는 거야
우리 집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계시지.
물론 나를 ‘도와주러’ 오시는 거지.
ㅇ 과장 내가 도와줄게 라며 내 일을 해주시는 거야
나는 내 맡은 바 업무를 나 스스로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어느 정도는 혼자 독립적으로 하고 싶은데
심지어 그걸 해주시면서 기쁨을 느끼신다는 거야....
그럼 내가 생각했던 내 자리를 어느 정도 내어드릴 수밖에 없는 거지.
실장님이 우리 집에 매일 오시기 시작하고
아이들을 돌봐주기 시작하시면서
하루에 한두 번은 꼭 통화할 일이 생기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 과 업무인데
(내가 과원이고 자기가 과장이라고 해보자. 우리 과 업무는 육아)
나는 아이들과 관련된 사항을
과장이랑 먼저 논의하고 싶은데
(학원 선택, 동선 등등)
실장님랑 소소한 것까지 논의하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과장의 역할이 사라져 버리고 말아.
거기다 과장은 실장님이 봐주시니까 넌 문제없지? 좋지? 하고 말하는 거야.
근데 내 고유업무에 관해 실장님의 의견도 있으신 거야...
그러니까 내 권한을 제대로 발휘하기가 어려운 거지
업무적으로 성장하기도 어렵고...
과장이랑 내가 같은 팀인 건지도 모르겠고 말이야
그래서 과장님한테
과장님 제가 좀 불편합니다 했더니
기분이 나빠하면서
야 나도 실장님 ‘사무실’에서 일주일에 한 번은 봐
불편해도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왜 그러냐고 그러는 거야...
오히려 고마워해야지 도리가 아니라고 그러면서...
내가 요청해서 해주시는 것도 아니고,
나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우리 집’에서 보는데...
그 불편함을 같은 선상에서 보는 게 이해가 안 되고 섭섭한 거지.
그리고
내가 할 수 있지만 도와주는 걸 기뻐하시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내 역할도 어느 정도 양보하고 내어드렸는데
어느새 내가 할 줄 몰라서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 취급을 받고 있는 거야.
과장이 막 그러는 거야
어이구 실장님 없었으면 어떡할 뻔했니
너 역량만으로는 우리 팀 업무가 안 돌아갔을 거야!라고...
무튼 쓰다 보니 너무 길어졌는데 ^^;;
이런 여러 상황을 표현했던 게
내 집이 내 집 같지 않다. 였던 것 같아.
우리를 신경 써주시니 좋지 하면서
부탁 안 해도 청소를 해주시고
(심지어 우리가 집을 비우고 있을 때 사전에 말없이)
각종 집안일을 도와주시고 챙기시고
애들 옷을 정리해 주시고
내 속옷까지 개어주시고...
그런 게 사실...
나는 무의식 중에 너무너무너무 불편했던 거야
그런데 그동안은
그게 내가 불편해도 참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 왔어
(왜냐하면 그러라고 하셨으니까.... 그 말을 흘려들을 수 없는 것도
기울어진 관계를 보여주는 단면이겠지.)
그런데 돌아보면 그건 참아야 하는 게 아닌 것 같아.
그래서 수술하고 집으로 오며 당분간 어머님이 집에 안 오셨으면 좋겠다 이야기했던 거고..
자기는 물론 기분이 나빠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
일단 내가 살아야 했거든. 내 집에서 내가 편하게 쉬어야 했거든,
몸의 아프고 나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
그리고 자기가 감당했던 우리 부모님에 대한 불편함과
내가 감당해야 했던 어머님 아버님에 대한 불편함은
정말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
내가 불면증이 심하고
항상 무언가 자기와 대화가 필요하다고 하고
이상하게 자기에게 필요 이상 짜증 냈던 것들이
사실 이런 나의 불편함을 알아줘
내가 이렇게 감수하고 있어 알아줘
그런 표현이 아니었나 싶어
나도 몰랐다가 이제야 깨닫고 있지만...
내가 내 마음을 더 잘 들여다보고
내 마음을 더 예쁜 말로 자기에게 설명할 수 있었다면
우리가 덜 싸우고
서로 스트레스를 덜 주고받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어.
하지만 직장 다니고 하니 여유가 안 생겼네...ㅎㅎ
아픈 게 꼭 나쁜 건 아닌 것 같아.
요즘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
좋은 일과 나쁜 일은 같이 온다
암은 정말 나쁜 거지만
꼭 나쁜 것만 가져오지는 않았어
이렇게 덕분에 제주도도 오고....ㅎㅎ
나의 마음을 좀 더 들여다보고
자기에게 내 마음을 잘 이야기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 것 같아서 좋아.
그동안 내가 자기에게 제대로 된 설명 없이
짜증 와 원망을 했던 것 같아.
당연히 내가 이런 걸 알아줘야 하는 거 아니야 하고
내 마음을 제대로 얘기하지도 않으면서
기대하며 부담을 줬어.
매번 날이 선 말로 상처 주고...
그래서 자기는 또 마음이 다치고...
미안해.
마음과 몸이 병들어서 내 안에 부정적인 감정이 너무 많았던 것 같아.
이제 수술도 했고, 몸건강 마음건강 챙기고
내 마음을 잘 관리해서
자기 마음도 다치지 않게
내가 노력할게.
혹시 이 편지에 자기가 기분 나쁜 부분이 있다면 사과할게
자기도 얘기해 줘. 내가 고쳐볼게.
우리가 잘 지내고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어야
우리 아이들도 행복할 수 있으니까.
항상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ps. 앞으로는 굳이 매일 아이들과 영상통화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그냥 음성 통화로 ㅎㅎ
아이들도 일단은 내가 병원에 있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고
애들 보느라 고생하시는데 어머님이 알게 되시면
혼자 제주도 와서 놀고 있는 것 같아서 눈치가 보이고... 마음이 편치가 않네
자기가 집에 없을 땐 아무래도 애들과 통화하다 어머님과 통화를 하며
내 상황이 오픈되는데 그게 좀 죄송스러워서...^^;;
(어제도 첫째가 거실서 통화하다 굳이 방에 있는 할머니를 바꿔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