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나와 그것, 이방인-신-괴물
"네가 너인 게 어떻게 네 약점이 될 수 있어." (재희)
"내가 나인 채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려준 내 20대의 외장하드." (흥수)
1923년에 <나와 너 : Ich und Du>를 기술한 철학자 마르틴 부버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나와 그것'(Ich und Es)과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가 존재하는데 우리 대부분은 '나와 그것'으로 살고 있다.
'나와 그것'은 상대에 대한 객체화(Objectification), 즉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물이나 물건처럼 대하는 일차원적인 관계다. 서로를 평가하고 저울질하여 원하는 것만을 얻어내는 관계로 우리는 늘 상대에게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기 위해 노력하며 스스로를 지우거나 낮춘다.
반면 '나와 너'는 인격체와 인격체의 만남이다. 말 그대로 공감적 경청, 심리적 수용이 가능한 인격적인 관계다. 이런 관계에서는 평가나 가면이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또 상대의 그런 모습을 수용할 수 있는 참된 관계다. 극중에서 재희가 흥수에게 건넨 "네가 너인 게 어떻게 네 약점이 될 수 있어"라는 말은 나와 그것을 뛰어넘는 나와 너의 관계로서의 전환을 시사한다.
비슷한 예로 보스턴 대학의 철학과 교수 리차드 커니는 2002년 자신의 저서 <이방인·신·괴물 : Strangers, gods, and monsters>에서 마르틴 부버의 개념을 조금 더 세분화시켰다. 자기보다 능력이 좋으면 신처럼 추앙하고, 비슷하면 타지에서 온 이방인을 보는 것처럼 무관심하며, 자신과 다르거나 능력이 떨어져 보이면 격리와 추방이 필요한 괴물로 본다는 타자성 이론으로 인간 관계를 설명했다.
영화의 인위적인 연출, 현실적인 개연성이 없는 전개가 몰입을 방해했지만 그래도 꽤 오래 인상 깊은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은 이유는 오직 재희 때문이다. 남들과 다른 상황에 놓인 흥수를 가치 판단을 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고 자신의 꿈,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는 당당한 재희.
나와 그것의 관계를 부수고 나와 너의 관계 그리고 이방인, 신, 괴물을 초월한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을 추구하는 재희 때문에 대도시의 사랑법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