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을 하기 전 어떤 것을 중점으로 두어야 할지도 파악했고, 프로그램 단축키도 어느 정도 공부했고, 용어나 이론 공부도 하였는데 막상 디자인을 하려고 보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는 생각이 들었나요? 디자이너들은 한 번쯤 ‘내가 하는 디자인 프로세스가 맞는 프로세스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저 또한 디자인을 처음 시작할 때 사수가 있긴 했지만 워낙 바빠서 제대로 된 프로세스를 배우기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지금 내가 하는 게 맞긴 한 걸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죠. 그렇게 첫 회사에서 제대로 된 프로세스를 배우지 못한 채 다음 회사에 갔는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일주일 동안 길게 끌던 작업을 새로 이직한 곳에서는 하루 만에 끝내는 걸 보고 “프로세스의 차이구나”라는 걸 한 번에 깨달았습니다.
프로세스 하나로 야근을 하지 않게 되었고, 자잘한 수정 작업이 줄어들게 되었고, 하루아침에 디자인을 싹 변경해버리는 일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많은 회사들이 이렇게나 좋은 프로세스를 도입하지 않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몇 군데의 디자인 회사를 접해보고 내린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정말 디자인 프로세스에 대해서 몰라서, 그리고 디자인 프로세스를 알면서도 업무가 너무 바빠서 도입하지 못하는 경우였죠. 맨 처음 컴퓨터가 나왔을 때 당시의 사람들은 수기로 작성하던걸 문서화시키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아니 지금 업무도 바쁜데 언제 저걸 문서화 시켜? 그냥 일단 해!” 뭐 틀린 말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만약 아직까지도 하나하나 손으로 작성해가며 일을 한다면, 우리는 오늘 안에 이 많은 업무를 완료할 수 있을까요?
아마 디자이너뿐 아니라 모든 직종이 다 그렇듯 업무에는 프로세스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프로세스 없이 ‘그냥’ ‘일단’ 디자인을 하는 건 결국 ‘처음부터 다시’라는 도돌이표를 만드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럼에도 디자이너는 물론이고 디자이너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이것에 대해 잘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죠. 디자인 프로세스는 디자이너와 기획자는 물론이고 디자인을 의뢰하는 클라이언트(혹은 내부 관계자)의 경우도 필수로 알고 있어야 효율적인 업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챕터에서는 디자인 프로세스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정리해 보았습니다.
디자인 회사의 근무 형태는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타 기업의 디자인 업무를 의뢰받아서 진행하는 ‘대행사’ 형태가 있고, 자사의 서비스와 제품을 홍보 및 판매하기 위해 사내 디자인 팀을 보유한 ‘인하우스’ 형태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두 가지는 많은 차이점이 존재할 듯하지만, 두 가지 형태의 회사를 모두 근무해 본 경험으로서 디자이너와 기획자 그리고 크리에이터 등 여러 창작자들이 모여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디자인 업무가 진행될 예정이니 이 단계에서는 어떤 자료를 준비해 주시면 됩니다.”
“이 단계에서는 디자인 콘셉트가 확정되니 더 이상의 콘셉트 변경은 어렵습니다.”
디자인 회사에 근무하던 시절, 고객사가 업무를 의뢰하면 저는 가장 먼저 [디자인 프로세스]에 대해서 안내를 하였고, 협의된 기획과 작업 일정에 맞춰 프로세스 가이드를 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각 단계마다 서로의 업무를 확실히 분장하여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습니다. 이는 각 단계별로 디자이너와 기획자 그리고 클라이언트가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고, 또 서로가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안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향후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서로 간의 뒤틀림 혹은 오류를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그럼 이제 각 단계별로 어떠한 수행과 소통을 해야 하는지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시각디자인 프로세스는 크게 여섯 단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는 많은 디자인 회사(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서 진행하는 디자인 프로세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회사마다 세부적인 프로세스가 다를 수 있고 소통하는 방법이 다를 수 있지만, 큰 맥락에서 다음의 순서를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나올 프로세스에서 클라이언트는 외부 혹은 내부의 디자인 의뢰자를 나타냅니다.
1) 레퍼런스 리서치 - 2) 콘셉트 기획 및 제안 - 3) 디자인 기획 및 시안 - 4) 디자인 시안 확정 -
5) 디자인 수정 및 검수 - 6) 최종 제작
1. 레퍼런스 리서치
디자인을 시작하기 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시장조사입니다. 디자인의 목적과 기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방향성에 맞춰 이미 잘 된 디자인들을 벤치마킹하는 단계입니다. 아마 벤치마킹만 잘 하더라도 디자인을 어떻게 할지 대략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질 겁니다. 만약 1인 가구를 위한 홈 트레이닝 제품 패키지 디자인을 해야 한다면 [피트니스 용품, 스포츠용품, 1인 가구 제품] 등 최대한 연관되는 여러 키워드들을 검색하여 자료(데이터, 이미지, 디자인 등)를 수집하면 됩니다.
2. 콘셉트 기획 및 제안
콘셉트 기획 단계는 디자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때 콘셉트가 모호하거나 불확실하게 정해진다면 향후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오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앞으로 작업할 디자인의 지표가 되는 일인 만큼 클라이언트, 기획자와 디자이너, 디렉터 모두가 참여하여 함께 협의하고 설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1) 콘셉트 기획
레퍼런스 리서치를 통해 찾은 자료들을 유사한 이미지끼리 분류합니다. 그 유사한 이미지들이 한 데 모인 걸 무드보드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의 무드보드에 앞으로 어떻게 디자인을 할지 디자인 키워드와 방향성을 제시한다면 그것이 하나의 디자인 콘셉트가 될 수 있습니다.
2) 콘셉트 제안
“이 방향성에는 이 콘셉트가 맞는 것 같은데 어떠세요?”
“네 좋습니다. 이 방향대로 작업 진행 요청드립니다"
여러가지 콘셉트를 기획했다면 클라이언트와 협의하여 콘셉트를 확정 짓습니다. 만약 이를 확정하지 않고 바로 디자인 작업에 들어간다면 앞서 말했던 것처럼 열심히 작업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처음부터 작업을 해야 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전문가의 관점에서 어떤 방향이 더 좋은지 제시를 하고 그 방향성을 믿고 따라주시는 고객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작업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3. 디자인 기획 및 시안
1) 디자인 기획
앞에서 콘셉트를 기획하고 제안하는 것도 디자인 기획 중 하나지만, 디자인 기획은 방향성을 잡는 것 외에도 레이아웃 배열, 기존 문구의 강약 조절 등 다양한 업무가 포함됩니다. 이미 완성된 기획안을 시각적으로 좋아 보일 수 있도록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기획하는 단계입니다.
2) 디자인 시안
디자인 콘셉트가 확정되고 디자인 기획도 완료되었다면, 협의된 콘셉트 아래 시안을 제작하는 단계입니다. 가장 먼저, 디자이너는 전체 시안을 작업하기 전 디자인 초안 단계를 거칩니다. 예를 들어 로고 디자인의 경우 종이에 여러 스케치를 해보고 스케치 시안을 보며 어떤 것을 디자인화할지 담당자들과 논의를 합니다. 수십 페이지의 회사소개서의 경우 전체를 작업하기 전 일부분(메인 표지와 목차, 일부 내지 페이지)을 작업한 뒤 이 방향으로 디자인을 하겠다고 제시합니다. 이때 중요한 점은 디자인 초안을 받아본 클라이언트는 디테일한 요소(폰트 크기, 띄어쓰기, 오타)보다는 디자인의 전체 콘셉트 아래에서 방향성에 맞는 디자인인지 아닌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초안 단계를 거친 뒤 그대로 진행해도 되겠다는 피드백을 받으면 본격적인 시안 작업을 진행합니다. 스케치로 구상했던 작업을 이미지로 시각화하고, 일부 페이지만 작업했던 디자인을 전체 페이지까지 진행하는 단계입니다.
4. 디자인 시안 확정
디자인 시안은 같은 콘셉트 아래 두 가지로 제시할 수도 있고 각각 다른 콘셉트로 한 가지씩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디자인 시안이 나오면 클라이언트는 디자인 시안에 대해 확정을 지어야 합니다. 이 단계에서 대부분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안이 모두 마음에 들어서 어떤 게 가장 좋은 디자인인지 선택을 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선택하지 못하는 경우이죠. 이때 수동적으로 결정을 기다리다가는 작업이 처음으로 돌아갈 확률이 높기 때문에 클라이언트가 생각을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움을 줘야 합니다.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면서 그저 눈에 예쁘고 멋진 디자인이 아닌, 올바르게 잘 된 디자인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리딩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5. 디자인 수정 및 검수
1) 디자인 수정
여러 개의 시안을 보고 최종적으로 디자인을 확정했다면 디자인 수정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이 단계에선 기획 단계에서 협의된 콘셉트 아래에서만 수정을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정해진 콘셉트를 바탕으로 디테일한 요소만 수정해야 한다는 뜻이죠. 만약 디테일 수정이 아닌 아예 다른 콘셉트의 디자인으로 수정 요청이 들어온다면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 사이에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고, 이로 인해 둘 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쳐버리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물론 마음에 드는 시안을 받을 때까지 추가 협의(계약)을 하고 처음부터 다시 디자인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결국 프로젝트 일정을 늦추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의 기획 단계는 너무나도 중요하고 디자인 수정 단계에서는 콘셉트가 아니라 오로지 디테일 요소만 수정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디테일 요소란 폰트, 컬러, 요소들의 크기 및 배열, 명도와 채도, 자간과 행간 등의 수정을 말합니다.
2) 디자인 검수
디자인을 실제 적용하기 전, 혹은 인쇄하기 전 꼼꼼히 검수하는 단계입니다. 잘못된 내용이나 오탈자가 나오지 않게 검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때는 디자이너, 기획자, 클라이언트가 여러 번 더블 체크를 하며 교정을 해야 합니다. 기획자는 처음부터 잘못 기입된 내용이나 오탈자가 없게 원고를 넘겨야 합니다. 수기로 작성된 기획안의 경우 디자이너가 하나씩 입력하느라 오탈자가 발생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 타이핑된 파일로 넘기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입니다. 디자이너는 기획자로부터 넘겨받은 데이터로 작업을 한 뒤 디자인이 완료되면 기획 원고와 디자인을 대조하여 내용을 체크합니다. 이때 누가 봐도 오타로 인식되는 부분은 디자이너가 고치는 것도 좋지만 디자이너가 내용 하나하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디자이너의 1차 체크 후 원고를 작성한 기획자가 2차 체크를 필수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클라이언트는 결과물에 잘못된 내용이 없는지 오탈자는 없는지 다시 한번 최종 검수를 하여 완료합니다.
6. 최종 제작
웹에 올라가는 콘텐츠라면 이미지를 사이즈에 맞게 저장하고 사이즈별로 제작하는 단계가 될 수 있고, 인쇄물이라면 인쇄용 파일로 출력하여 인쇄 교정을 한 뒤 납품하는 단계가 최종 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세스란, 생각해 보면 결코 어려운 것들이 아닙니다. 디자인을 작업하기 전 조금 더 면밀히 기획하고 신경 쓴다면 오히려 시간을 단축하고 작업자들이 효율적이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됩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프로세스가 없다면 디자이너들은 무슨 일이 생길까요?
첫 번째, 완료된 기획안으로 디자인을 진행했는데 전혀 다른 콘셉트로 수정요청이 들어와 처음부터 새로 디자인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이때는 콘셉트 및 원고 기획이 모두 완료된 상황에서 디자인을 진행하는 것이 맞다고 설명한 뒤, 콘셉트와 기획에 대한 확정을 지을 수 있도록 제시합니다. 또한 디자인 수정 단계에서는 디테일 요소를 수정해야 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전달합니다.
두 번째, 기획자나 클라이언트의 마음에 들 때까지 디자인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때 디자이너는 계속되는 시안 작업으로 인해 실제 자신의 실력보다 훨씬 평가절하 되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획 단계를 명확하게 하여 정해진 일정안에 효율적으로 업무를 할 수 있도록 협의해 나갑니다.
세 번째, 상사에게 컨펌을 받고 진행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대표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콘셉트를 바꾸라고 합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면 디자인 콘셉트 논의를 할 때 상사와 대표님까지 함께 참여하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함께 참여하자고 건의하였지만 의견이 지속적으로 묵살되고 똑같은 일이 발생된다면, 더 이상 디자이너로서 올바른 방향으로 업무를 진행하기 어렵고, 배울 것이 없기 때문에 미련 없이 이직 준비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네 번째, 디자이너가 내용 검수 및 오탈자 교정까지 하도록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간혹가다 기획자가 오타를 내놓고 디자이너에게 왜 검수를 하지 않았냐며 나무라는 경우도 있습니다. 직접 당해본 적이 있는데 매우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이럴 때는 업무 분장 시 디자이너의 업무가 아님을 확실히 설명합니다. 즉 디자이너의 업무영역과 기획자의 업무영역을 확실하게 구분 짓고 제시하는 것입니다.
모두 제가 회사에서 근무할 때 실제로 겪었던 상황들을 예시로 들어 보았습니다. 이는 아주 대표적인 상황일 뿐, 세세한 문제는 아마 더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주위의 많은 디자이너 지인들이 이와 같은 문제로 회사를 힘들어하고 퇴사를 결심합니다. 가장 큰 이유가 <프로세스>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디자인적인 욕심으로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더 많은 시안과 퀄리티를 뽑아낼 수 있겠지만 개인적인 경험 상 뿌듯함보다는 프로세스의 부재로 인한 감정적 리스크가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디자이너는 물론 디자이너와 소통하는 모든 사람들이 프로세스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하고, 프로세스가 제대로 잡히면 업무의 효율성은 물론 결과의 만족도 또한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디자인, 그래서 프로세스가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