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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다 Dec 12. 2024

"로맨틱 디스토피아"의
기획전을 마치며 시작하는 글

인디쇼츠x연남가든! 인디스페이스

  석양이 물감처럼 튀어 파란 하늘을 덮치는 광경을 사진으로 담기 위해 나와 친구는, 오르던 계단에 잠시 멈춰 휴대폰 카메라를 켰다. 롱보드를 한 팔에 끼운 채 한강 공원의 한 편의점 입구에 서 있었다. 우리는 셔터를 눌러대는 횟수만큼 아름답다는 말을 내뱉었다.


 짧은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을 때 박스 몇 개를 끌어안고 턱으로 짓눌러 고정하며 계단을 오르려는 물류 배송원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노을의 황홀경에 빠져 좁은 계단의 너무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나와 친구는 머쓱한 사과를 건네며 배송원에게 길을 터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하늘로 시선을 옮겼지만 배송원은 편의점으로 들어가지 않고 잠시 후 우리를 불렀다. 주변의 사람들이 사라지길 잠시 기다린 것 같았다. 40대 후반 혹은 50대 초반 정도의 배송원은 아주 수줍게, 작은 목소리와 겸연쩍은 웃음을 섞어 우리에게 물었다.  


"저... 죄송한데, 제가 영어를 몰라서 그러는데..."


 배송 명세서를 든 손으로 시선을 옮기며 박스를 받치고 있던 손가락을 하나 겨우 펴서 '피츠'라는 글자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시선으로나마 최대한 가리키며 이 중에 '피츠'가 있는지 물었다. 그가 들고 있던 박스들 맨 아래에 'Fits'가 있었다. 빨갛고 파랗게 쓰여 눈에 아주 잘 들어왔기에 아래 있는 박스가 그렇다고 알려주었더니 이걸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질문이 되돌아왔다. 그에겐 생업일 텐데 이런 상황을 매번 마주쳐 왔으리. 마치 내가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냥 기분이 불쾌해졌다. 이내, 공감이라는 것이 불타올라 최선의 설명을 해 줄 방법을 찾고 있는데 영어 제품명 아래 아주 작게 '피츠'라는 글자가 적힌 것을 발견했다. 알고도 찾으려 하면 찾기 힘들 정도로 작은 글씨체와 크기였다. 배송원에게 보여주니 공허한 한숨 같은 말로 고맙다며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그날 배송원의 땀 맺힌 얼굴이 기억에 남는데 그게 자꾸 눈물처럼 상기되는 건 그가 남긴 고맙다는 말에 섞인 숨이 간결하지만은 않아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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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정말 오랜만에 어릴 적 살던 시골 마을에 들른 적이 있다. 30년 전 다녔던 유치원 건물이 그 자리에  있었다. 물론 폐원되어 방치된 채였지만.  나는 그렇게나 변화라는 것이 어려운 작은 동네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을 생각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장면은 버섯 따러 산에 오르는 아빠의 뒷모습이다. 아빠의 등을 바라보며 아빠가 디딘 발자국만 따라 밟다 보면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축축하게 젖어 엉겨 붙은 낙엽과 그것들이 옮겨 붙은 나의 신발.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솔향이 짙게 퍼지는 축축한 산 내음과 습기를 머금은 산속의 웅장한 냉기 그리고 땅 속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묘한 음정들. 그런 것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세월이 흘러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그때는 당연해서 아름답다는 걸 몰랐지만 내가 그리는 유토피아는 과거에 가깝다는 생각을, 해가 갈수록 확고하게 한다.


 지금 사는 서울의 동네는 10년 동안 수많은 것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데 나는 그 격동의 변화들과 발맞춰 살아가고 있음에도 아직 적응하지 못한 것들 투성이다. 하루에도 너무 많은 개념들을 나름의 정의로 확립하며 살아가야 하는 현재의 나는 점점 부족한 사람이 되어간다. 넘치는 정보를 소화해 내기 버거워 사회에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늘 의심한다. 때론 대상 없는 열등감을 느끼기도 한다. 결국 나의 가치관과 취향마저 흔들리고 자존감은 수시로 바닥을 친다. 그러지 않기 위해 더 많은 정보를 입력하려 하면 할수록 악순환. 사색 없이 쌓인 모든 개념들은 디스토피아적 관점으로 각인되어 비관적인 삶을 살고 있진 않은가ㅡ 가장 많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배송원에게 당신이 살고 있는 이곳은 어떤 곳일까. 단 그 하루만으로만 단정 짓는다면 어떤 날이었을까.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친구들이 있다. 있었다. 며칠 밤이며 논쟁을 벌이고 술 한 잔 톡 털어내며 그래도 어디 한 번 살아보자며 투닥투닥 다독임 받고 싶은 이들. 방법을 알아내기 전에 너무 빨리 생을 마감해 버린 사람들. 훗날을 기약하며 혼자 되뇌고 곱씹어야 할 문제가 되어 버린, 혼자서는 다듬어지질 않는 이야기들을 어떻게든 늘어놓고 싶어 단편영화 상영회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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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가지 형식으로 글을 쓴다.  글 쓰는 행위는 그저 삶의 공허함이 생길 만한 빈 틈을 채울 무언가가 필요하거나 헝클어진 시간들을 줄 세워 순서를 정하고 싶을 때 오롯이 개인적인 이유로 시작되고 끝이 난다. 그때마다 나의 기저를 발견해 내면 결국은 고독에 가까운 외로움이더라(양 쪽 중 어느 쪽에 가까운지 아직은 모르겠다). 고독 혹은 외로운 감정으로 인해 나의 글쓰기에 남겨진 비교적 최근에 많이 떠올렸던 키워드들을 단편영화 기획에 반영해 보고 싶었다. 어려운 말로 허세를 퍼부었지만 그것은 우리말로 하면 될 것을 구태여 영어와 한문으로 범벅해 말 뜻의 본질을 흐리는 상황들을 자조적이고 해학적이게 풍자하고 싶었다. 아무도 그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 같지만.


 어쨌든 이 단편영화 기획은 지극히 위트 있다. 진지하지 만은 않다. 영어가 넘치는 세태를 나무라놓고 위트라고 굳이 쓰는 나도 진저리나지만 이것을 국어로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적절히. 다시 자괴감에 빠지며 이야기를 이어 가자면, 나는 삶에 있어 모든 해결은 위트와 연관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예술적인 것이 결코 진지한 것만은 아니길 바란다. 디스토피아를 살아내는 동안에도 로맨틱한 순간들을 찾아가길 바라는 제목처럼. 영화가 그 몫을 좀 담당해 주었으면 좋겠기도 하고.


2023. 06. 17 - 1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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