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웨스 앤더슨, 2014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년들의 익살스러운 모험담
저는 ‘만화 영화’ 세대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90년대만 해도 ‘애니메이션’이라는 용어는 생소했습니다. 사실 생소했다기보다는 잘 쓰이지 않았다는 게 정확할 겁니다. 그때는 다들 ‘만화 영화’라고 불렀었죠. 아이들은 코를 흘리며 뛰놀다가도, 해 질 녘이 되면 만화 영화를 보러 집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예전에는 공중파에서도 흔히 장편 만화 영화를 방영했었던 것 같은데요. 언제부턴가 TV를 코앞에 두고 앉아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아이들의 모습은 많이 사라진 듯합니다. 밥을 입에 떠 넣으라는 어머니의 잔소리에도, 주인공의 모험담을 숨죽이며 지켜보던 시절은 이제 추억이 되었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첫인상은 꼭 어릴 적 보았던 만화 영화 같았습니다. 악당을 골탕 먹이며 대결하는 소년들의 익살스러운 모험담을 닮았다고나 할까요. 짜 맞춘 듯 동선을 그리는 인물들과 엔더슨 감독 특유의 재기 발랄한 연출은 유년 시절의 감성을 들추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감상을 되짚다 보니, 문득 이 작품 안에 등장하는 ‘소년’이라는 이미지를 한번 들여다보고 싶어 졌습니다. 더 엄밀하게는 작품에 드러나는 두 주인공의 면모가 소년의 여러 성질을 띠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앞서 많은 리뷰들이 독특한 화면 구성과 아기자기한 설정, 과거 유럽에 대한 향수 등 이 작품의 다양한 주안점을 짚은 바 있기에, 저는 조금 다른 면을 살펴볼까 합니다.
먼저 작품의 내용을 간추리자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콘시어지 ‘구스타프’와 충직한 로비 보이인 ‘제로(무스타파)’의 모험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계가 전쟁의 포화에 휘말리기 시작하던 1927년. 구스타프의 오랜 고객이자 연인이었던 대부호 ‘마담 D.’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이 터지면서 이야기는 급발진됩니다. 구스타프는 그녀의 유산 가운데 저명한 화가 ‘반 호이틀’의 걸작인 ‘사과를 든 소년’을 증여받게 되는데요. 이를 두고 볼 수 없던 장남 ‘드미트리’는 마담 D.를 살해한 용의자로 구스타프를 지목합니다. 구스타프는 곧 수감되지만, 이미 제로와 함께 ‘사과를 든 소년’을 빼돌린 후였죠. 이제 한 배를 탄 구스타프와 제로는 드미트리와 그가 고용한 킬러 ‘조플링’에 맞서, 누명을 벗고 ‘사과를 든 소년’을 지켜내야 합니다. 이야기는 난해하지 않습니다. 악당 드미트리와 조플링이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고, 사건의 내막은 무엇인지 영화는 비교적 친절히 이야기해줍니다.
사과를 든 '사춘기 소년들'
‘반 호이틀’과 그의 작품 ‘사과를 든 소년’은 모두 영화를 위해 창조된 가상의 존재입니다. 구스타프는 이 걸작을 두고 ‘성인에 접어드는 소년’을 아주 아름답게 그려냈다고 칭송합니다. 이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담 D.의 저택에서 그림을 몰래 가지고 나온 두 사람은 그 길로 호텔로 돌아가는 기차에 탑니다. 구스타프는 객실 안에 그림을 걸어놓고 감탄하다가, 익살스레 소년의 포즈를 흉내 냅니다. 그리곤 제로에게 자신과 그림 속 소년이 닮지 않았느냐 묻죠. 그러자 그림 귀퉁이에 걸린 작고 동그란 거울에 제로의 얼굴이 깨알같이 비칩니다. 이로써 그림 속의 소년과 그를 흉내 내는 구스타프, 그리고 이를 관조하는 듯한 제로가 한 프레임에 모입니다. 이 장면은 꽤나 의미심장합니다. 각자 다른 구도로 놓인 세 인물이 ‘소년’이라는 한 가지 이미지로 관통되는 지점이기 때문이죠.
구스타프의 설명에 비춰볼 때, 그림 속의 소년은 ‘사춘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소년에서 성인으로 접어든다는 것은 곧 사춘기를 의미하니까요. 그러고 보면 그림 속 소년이 들고 있는 사과도 아직 빨갛게 익지 않았고요. 우리의 일반적인 관념에서 사춘기는 불안하고 예민하며, 변덕스럽고 다소 위태롭기도 합니다. 미성숙과 성숙 사이에 머무르는 사춘기는 어른이 되기를 열망하는 동시에,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더불어 미성숙하지만 아이다운 순수한 일면을 갖고 있습니다. 구스타프는 그림 속 소년을 흉내 내면서, 동시에 소년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듯한 대사를 꺼냅니다. ‘마담 D.가 저 그림을 보며 나를 생각했듯, 나도 그녀를 생각할 것’이라 말하죠. 그러면서도 금세 마음을 바꾸어 그림을 팔아버리는 게 좋겠다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 구스타프는 매우 재미있는 인물입니다. 그의 작중 언행들을 살펴보면, 얼핏 고상한 어른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론 어린애 같기도 합니다. 그가 마담 D.를 대하던 태도에서도 이런 면모가 보이죠. 마지막으로 호텔을 떠나기 전, 마담 D.는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매우 불안해합니다. 한데 구스타프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달래다가도, 금세 손톱 색깔을 지적하며 ‘몸서리처지도록’ 맘에 들지 않는다고 말해요. 서로 사랑한다고는 말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어째 연인보다는 할머니와 영악한 손자 사이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구스타프는 품위와 고상함이라는 단어를 그림으로 그린 듯한 인물입니다. 머리는 항상 이마가 보이도록 넘겨 올리고 우아하고 부드러운 말씨를 가졌으며, 허리를 곧게 펴 성큼성큼 걷습니다. 그런가 하면 마담 D.의 부고를 전해 듣고서 루츠로 떠나야 할 때, 경황없는 가운데서도 애음하는 '포이이 주베 26년산'을 꼭 챙기라 주문합니다. 얼음통과 잔도 빼놓지 않고 말이죠. 늘 옷 위에 덧칠하는 파나쉬 향수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살인 누명을 쓰고 수감된 와중에도 호텔 직원들에게 당부의 편지를 보내며 콘시어지로서의 품위와 권위를 지키려 합니다.
반면 그런 고상함과 품위 속에서도 그는 감정에 충실한 모습을 보입니다. 여느 아이들처럼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죠. 천신만고 끝에 감옥에서 탈출하여 구스타프는 제로와 재회하게 되는데요. 제로가 파나쉬 향수를 미처 챙기지 않은 것을 알자 그가 미천한 이민자라는 사실까지 들먹이며 짜증을 냅니다. 정작 신분을 감출 변장이나 은신처 같은 중대한 문제들은 그냥저냥 넘어가면서 말입니다.
이렇듯 성숙과 미성숙을 쉴 새 없이 넘나드는 구스타프의 캐릭터는 그의 존재감을 더욱 돋보이게 만듭니다. 더욱이 소년다운 용기와 약간의 무모함은 영화의 플롯을 추동하는 데에도 영향을 줍니다. 마담 D.가 자신에게 '사과를 든 소년'을 증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벅찬 심정으로 제로를 데리고 가서 그림을 보여줍니다. 물론 그림을 잘 모르는 제로는 걸작에 대한 찬양을 멀뚱히 듣고만 서있고요. 그러다 말없이 눈빛을 교환한 두 사람은 그림을 가져가 버리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져간 그림에는 구스타프의 누명을 풀어줄 중요한 열쇠인 마담 D.의 두 번째 유언장이 숨어 있었지요. 문제는 정작 그림을 훔친 주인공 두 사람이 그 비밀을 모른다는 겁니다. 주인공들이 분투하며 그 비밀이 밝혀지는 과정이 사실은 플롯을 지탱하는 중추인 것이죠.
구스타프와 소년과 그리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구스타프가 '허영'에 찬 변덕쟁이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단편적인 생각에 불과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전쟁 이전의 유럽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직유 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저는 유럽인도 아니고, 유럽에 대한 경험도 많지 않기 때문에 옛 유럽의 향취가 진정으로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여러 미디어를 통해 간접 경험할 뿐이죠. 그런데 영화를 몇 번 더 보면서, 구 유럽의 분위기와 품위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영화 속 구스타프를 지켜보며 그 향수를 체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가 이야기하는 옛 유럽의 가치와 향수는 주인공 구스타프와 그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호텔의 모습으로 아름답게 실체화됩니다. 구스타프의 소년다운 일면은 전쟁의 폭력 가운데에서도 지난 시대의 품위와 인간다운 순수함을 은은하지만 동시에 강렬한 향기로 지켜내려는 의지의 표상인 것이죠. 물론 감독이 작품을 통해 그런 거창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영화를 다시금 보면서 감독이 의도했던 그렇지 않았던 혹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던, 새로운 일면들을 찾아보는 일도 즐겁다고 봅니다. 그런 게 아니라면 그저 이 영화를 어릴 적 보던 모험 가득한 만화영화처럼 유쾌하게 즐기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