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 그리스> , 2017, 크리스토퍼 파파칼리아티스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제난과 사회적 갈등에 허덕이는 그리스에 세 명의 사람이 찾아와 저마다의 사랑을 한다. 재미있게도 그들은 서로 모두 다른 곳에서 왔으며, 다른 형태로 그리스에 섞이거나 혹은 유리된다. 그리스인과 이방인으로 이뤄진 세 커플은 영화 상에서 각각의 쳅터로 나뉘어 사랑의 양상을 펼쳐 놓는다. 이를 통해 영화는 현재 그리스가 겪고 있는 현상의 다양한 층위를 보여준다.
#1. 부메랑 - 시리아에서 떠밀려온 유랑인, 파리스
파리스는 고향인 시리아에서 자행되는 폭력을 피해 그리스로 흘러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폭력의 손아귀에 포위되어 있다. 그리스 내의 극단적인 파시스트들은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유랑인들을 그리스의 끄트머리까지 내몬다. 영화에서 난민들이 모여 사는 곳은 폐쇄된 공항이다. 갈라진 활주로와 더는 날지 못하는 여객기들이 상흔처럼 남겨진 곳이다. 이렇듯 난민들이 숨죽여 사는 폐공항은 다른 나라로 도망칠 수도, 현재의 나라에 정착할 수도 없는 그들의 막막함을 대변하는 듯하다.
어느 밤거리, 파리스는 괴한에게서 다프네를 구해준 계기로 그녀와 인연을 맺게 된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는 다프네와 고향에서 미술을 배웠던 파리스는 급속도로 가까워지며 사랑을 싹 틔운다. 그들의 사랑은 때 묻지 않고 자유롭고 열정적이지만, 결코 녹록지 않다. 다프네의 아버지는 그리스로 유입된 난민들에게 피해 의식을 느끼며 증오를 품는다. 그는 파시스트 세력과 손을 잡고 그들을 박해하는 데 동참한다. 딸이 난민 청년과 사랑에 빠진 줄도 모르고 아버지는 거리에서 폭력을 자행한다. 사랑을 나누는 연인과 난민을 폭행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교차되어 흐를 때, 관객은 연인의 사랑이 끝내 파국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을 느낀다. 이런 방식으로 묘사되는 그리스 사회의 명암은 상처를 입고 흘러온 이들을 껴안는 것이 얼마나 절실한 가를 이야기한다.
#2. 로세프트 50mg - 스웨덴에서 날아온 저승사자, 엘리제
40대 가장 지오르고는 신경안정제 로세프트를 주기적으로 복용한다. 물 한잔 곁들이지 않고 조그만 알약을 꿀꺽하고 삼킨다. 그는 힘들고 지쳤다. 경제난 때문에 직장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고, 아내와는 불화를 겪은 지 오래됐다. 그런 그에게 차가 워보이지만 아름다운 엘리제가 나타난다. 여차저차 불같은 밤을 보낸 두 사람은 이후로 서로에게 빠져들기 시작한다. 처음에 엘리제는 불안과 권태에 시달리는 지오르고에게 색다른 활력을 주는 여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가 지오르고가 다니는 회사의 매각을 위해 파견된 사람임이 드러나면서, 여신은 일순간 직원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저승사자로 변한다. 엘리제는 회사의 매각을 순조롭게 하기 위해, 실적이 저조한 직원들을 차례차례 정리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엘리제가 여신과 저승사자 사이를 오가는 가운데에서 두 사람의 사랑을 끊임없이 포착한다. 지오르고는 엘리제와의 관계 속에서 안정과 행복을 느끼지만, 직장에서는 그녀에 의해 잘려나가는 동료들의 고통을 목격한다. 냉정한 엘리제 또한, 직원 명단에 적힌 지오르고의 이름 앞에서 망설이며 갈등한다. 아슬아슬하다. 사랑의 뒷면에서는 어떤 감정이 휘몰아칠지 모르지만, 그들은 관계를 이어나간다. 그것은 그들 스스로 감당해야 할 현실의 무게를 알면서도 일단은 고통을 쫓으려 알약을 삼키는 자위적인 행위와 닮았다.
#3. Second Chance - 독일을 떠나온 이민자, 세바스찬
마리아는 그리스의 평범한 가정 주부다. 그녀는 주부로서의 생활에 권태로움을 느끼며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가사를 돌보고 애용하는 마트에서 상품들을 둘러보는 것이 그녀가 평소 하는 일의 전부다. 그녀는 결혼과 육아, 가사에 떠밀려 학업을 포기했고, 그저 주부가 아닌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될 기회를 잃었다. 그런 그녀에게 독일에서 온 역사학자 세바스찬이 나타난다. 지적이고 온화한 세바스찬은 마리아에게 관성과 권태의 상징에 불과했던 마트를 순식간에 뒤바꿔놓는다. 마트는 이후로 지식과 새로운 자극의 무대이며 가슴 설레게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세바스찬은 마리아에게 'Second Chance두 번째 기회'라는 책을 선물한다. 그러나 영어로 쓰인 그 책을 마리아는 당장 술술 읽을 수 없다. 그녀는 돋보기를 쓴 채 사전을 펼쳐놓고 한 자 한 자 책을 읽어 나가기 시작한다. '두 번째 기회'라는 제목은 그녀에게 세바스찬이 어떠한 존재인지 분명하고 선명하게 은유한다. 그리고 마리아라는 개인을 넘어, 공간적 배경이자 갈등과 위기에 침잠한 그리스 또한, 곧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기를 영화는 말하는 듯하다.
영화는 만남과 사랑, 갈등과 이별이라는 멜로 영화의 장르적 문법을 잘 따라간다. 세 쌍의 커플이 겪는 사랑을 그려내며, 희망의 불씨가 될 사랑이라는 가치를 끊임없이 역설한다. 에로스의 신화를 빌려 모든 것은 사랑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같다는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운다.
다만 이 영화에서 사랑이 모든 갈등과 위기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현실적인 장애물들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깨부수지 못한다. 사랑의 순간을 아름답게 그려냈지만, 현실을 결코 외면하지는 않았다.
이렇듯 사랑이 갈등을 해결할 대안이 될 수 있다 해도, 현실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랑은 모든 것의 근원이 될 수도 있지만, 사랑이 모두 아름답고 행복한 결말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런 경우를 아주 흔하게 접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 영화가 사랑의 가치를 역설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의 결말에서 결국 다시 이어지는 커플은 마리아와 세바스찬뿐이다. 그러니까 '두 번째 기회'는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사랑은 완벽한 대안이 될 수는 없지만, 갈등을 해결할 새로운 기회를 창출할 수 있다. 나와 다른 것을 이해하고 감싸 안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기회는 언제든지 다시 찾아올 수 있다. 이렇듯 사랑이 낳는 영속성은 그 자체로 희망이 된다.
<나의 사랑, 그리스>에서 등장하는 그리스는 무너지고 있다. 경제적 타격과 사람들 간의 갈등과 폭력으로 얼룩지고 있다. 사랑이 이 위기를 당장에 타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더듬더듬 사전을 찾아가며 낯선 언어로 된 책을 읽어 나가듯 사랑해야 한다고 전한다. 물론 노력과 끈기가 필요한 일이겠지만, 그로써 희망의 불씨를 발견할 수 있다면 해볼 만한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