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 혹은 비영리에서 한번쯤 일해보고 싶었다
개인의 역사나 고유한 생각에 이토록 관심 없는 곳은 처음이었다. 입사 후 한달이 지난 시점이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선 자리를 내려보며당황했다. 어느 환경에나 바위를 깰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아무리 경직된 분위기의 사무실에서도 나름의 능청으로 적응해왔다. "저 입사 이래 이사님이 누구 밥 사주는 거 처음 봤잖아요", "상무님이 저렇게 농담을 하다니 너무 신기해요." 다른 임직원들에게는 '한번도' 보인 적 없다는 얼굴을 꺼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내 특기이자 즐거움이었고 정말이지 그건 일도 아니었다. 새 환경에 녹아드는데 열흘이면 오래 걸린 편이었다.
10년 전부터 일관적으로 들은 긍정의 평이 있다면 주변 분위기를 밝게 해 준다는 것이었지만, 이곳은 6개월이 지나도 묘연했다. 서로 나이를 모르는 곳. 연차가 의미 없는 곳. 함께 밥을 먹고 가끔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지만 사는 곳이나 나이나 연차가 궁금해지면 천천히 상대의 표정부터 읽는 곳. 그러다 결국 묻지 않고 침을 삼키는 곳. 조급하지도 내세우려하지도 않는 곳.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평등은 좋은 것이다. 상하를 구분 짓는 호칭 없이 '선생님'으로 부르고 불렸다. 선생님, 선생님. 들어도 들어도 어색하고 불편한 말이었으나 대안이 없었다. 친해진 사람들과 다른 식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위화감과 소외감을 낳을 수 있으므로 평등에 반했다. 조직 내 특정 권력, 관계의 치우침을 키우지 않으려는 취지이니 바람직한 내규였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격증 없는 돌팔이 의사가 된 기분이 들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부르고 듣는 말이 8개월 내내 익숙해지지 않았다. 선생님. 사무실 밖에서는 누가 들을까봐 눈치를 보고 소리를 낮췄다.
지향점이 맞는 사람들과 생각을 공유하고 시야를 넓히고 싶었다. 공공기관, 인권, 환경 등 키워드를 좁혀 취업 준비를 한 이유였다. 그동안 실로 많은 것을 배웠다. 일평생 익숙했던 인권 관련 개념을 재정립하고 수정하는 과정이 있었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 행동한 태도와 매너에 대해 돌아봤다. '애인'이라는 단어가 포용적인 단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결혼하셨나요. 남자친구가, 여자친구가 있나요. 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파트너가 있나요, 라고만 물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남자일 수도 여자일 수도 있으며 결혼을 하거나 결혼하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살아갈 수 있었다. 본인의 선택과 취향을 두고 설명이 요구되지 없도록, 질문이 동시에 폭력이 되지 않도록 포용적인 단어를 썼다. 이곳에 오기 전에 남자친구 있어요? 여자친구 있어요? 결혼했나요? 가 누군가를 지독하게 아프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다만 파트너라는 편한 언어를 사용할 생각을 못했다. 질문을 받은 이는 혼자가 아닌 상태를 두고 애인이 있어요. 라고만 말했다. 애인은 이성이거나 동성일 수 있었고 물론 배우자거나 동거인일 수 있었다. 이성애자와 결혼했고 자녀가 있는 사람도 가급적 포괄적 의미의 단어를 썼다. 아예 사생활 언급을 최소화하려는 분위기가 있었다. 충분히 친해졌을 때나 당사자들끼리 납득할 만한 분위기가 조성된 때에 결혼 이야기가 오가기는 했다. 전반적으로 포용적이고 안전했다. 이 정도의 문화와 배려가 건물 밖으로 널리 퍼지고 안착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상처주기, 폭력의 최소화를 의식적으로 점검하는 세상.
입사 초기에 출퇴근 시간을 문의하려다 자녀에 대해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며칠 뒤 내 배우자를 언급할 일이 있었다. 맞은 편에서 국을 떠 먹던 팀장은 그제야 "아, 결혼을 하셨군요"라고 말했다. 아이가 있다고 무조건 결혼을 했을 거라 단정짓지 않았던 것이다.
회사는 한번씩 드물게 간식을 돌렸다. 전사적으로 피자가 제공된 후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이 있었다. 본인은 비건이고 본인과 같이 특정 음식, 특정 성분을 섭취하지 않는 일원에 대한 배려가 없으니 아쉽다는 내용이었다. 전체 회의가 있던 날 그 의견에 대한 회답으로 회의장 입구에는 스콘이 종류별로 준비되었다. 말차, 초코 등 다양한 맛이 진열돼 있었고 비건 스티커가 붙여진 것도 있었다. 누락된 소수를 고려하지 못한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공식적으로 인정해 태도를 수정한 것이다. 나는 당신과 다른 사람이다,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내 분위기와 이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수정한 조직의 태도에 나는 적잖이 감동받았다. 비건, 페스코, 베지테리언 또는 특정 취향과 가치를 위해 일상을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이 부서별로 있었고, 자신의 취향과 목표를 말할 때 쑥스러운 표정이 없었고, 커피를 마시러 나갈 때면 3분의 1정도는 텀블러부터 챙겼다.
꼰대가 있었다. 많았다. 꼰대는 어디에나 있고 이처럼 조직적 분위기가 꼰대를 멀리할 때, 꼰대는 더 집요하게 존재했다. 다른 조직이었다면 나이에 가려 여간해서 드러나지 않았을 20대 주니어 꼰대가 맨얼굴을 보였고, 권위주의에 혁명적으로 반대하여 이제는 스스로 대척점에 위치한다고 믿는 연륜 있는 경력직들은 혁명적으로 나이든 꼰대였다. 지난 10년 간 정규직과 프리랜서 상근직을 포함해 경험해본 조직 9개 중에서 여기는 어느곳보다 꼰대가 많았다. 일찍이 자신들을 정의한 수식어가 '열린', '평등의', '존중의' 등이었으므로 그 개념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래서 더 무서운 꼰대였다. 자신이 하는 일과 하는 말, 정한 기준과 결정이 무비판적으로 공공을 위한다는 착각이 내재했다. 사기업의 사람들이 더욱 겸손하고 이타적이고 솔직하고 성실하며 심지어 공공의 이익을 의식한다는 사실을 그들만 까맣게 몰랐다. 자신들이 일상적으로 누리고 애용하는 서비스와 상품이 삶에 편의성과 공공성의 기능을 더하고, 그것을 기획하고 생산한 것이 사기업이라는 사실을 망각했다.
사기업은 피튀기는 경쟁 시장에 도덕적 기준이 낮고 오직 그들의 이익을 위해 차갑게 돌진하는 물질만능주의의 표상으로 여겼고 그런 곳은 아무래도 다니기 힘들 거라 했다. "허세기를 못 버리고 꼴에 더러운 일은 안 하겠다며... 때 안 묻히겠다는 거죠." 직전까지 사기업에만 있었던 나를 앞에 두고 푸념하듯 한 말이었다. 경제적 앞가림이 막막하다는 식의, 스스로를 비하하는 형태를 취하면서 바깥 세상을 내려봤다. 소수의 취향을 존중하고 폭력에 놓인 약자를 위해 일한다는 30대 초중반의 사람들이었다. 방금 한 말이 얼마나 때 묻은 생각인지 알 리가 없었다. 공공성과 공익성을 특정 기관에서만 의식한다고 믿는 무지함에 비웃고 싶어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사기업은 돈만 많이 주면 된다고 말하는 뉘앙스에서 본인은 중요한 가치를 위해 이를 선택했다는 경건한 자부가 베어있었다.
둘을 모두 경험한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들의 차이는 정말로 어떠한 가치관으로 구분되기보다 직무적 성향의 다름에 가까웠고, 미안하지만 당신은 일반 기업에서 일하기엔 능력이 미달이라 힘들 거라 알려주고 싶었다. 혹여라도 호기심을 품지 말고 지금처럼 여기 머무르세요. 아마, 계속 머무르게 될 겁니다. 기관이 지향하는 정체성에 묻힌 오만에 숨이 막혔다.
그래서 사기업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나은 세상을 위한 노력과 기여는 옆자리 사람을 존중하고 함께 가려는 의지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소서와 면접의 승리로 공공기관에 입사했다고 해서 공공성과 공생의 가치가 절로 내면화되는 건 아니니까. 좋은 사람 덜 좋은 사람, 투명한 사람과 부패된 사람, 비아냥과 아집에 잠식된 사람과 봄빛처럼 온유한 사람. 어딜 가나 있다. 나는 비영리에서 일을 하고 싶었었다.
사직서를 내고 마음이 맑아졌다.